대한불교조계종 강화도 보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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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이라는 질곡을 헤쳐 나온 한국불교는 일제가 자행한 식민지 불교정 책에 의해 또다시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일본은 한편으로 한국불교를 크게 장려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말살시켜 갔으며 결국은 한국불교를 완전히 예속시키기 위한 정책을 시행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지 불교정책에 의해 한국불교는 또다시 심한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 갔지만, 몇몇 선각자들의 불교운동을 통해 이 시대 불교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갈 수 있었다. 박한영(朴漢永, 1870∼1948)스님은 바로 이러한 선각자 가운데 한 분이었다. 스님은 일제의 식민지 불교정책에 강하게 맞서 싸운 불교 운동가였으며, 한국불교의 미래는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불교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던 불교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스님은 백용성(白龍城, 1864∼1940)·한용운 (韓龍雲,1879∼1944)스님과 함께 일제시대의 한국불교를 지켜낸 3대 선각자로 꼽히고 있으며, 근대 불교교육의 가장 으뜸가는 선구자로 오늘날까지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한영스님이 보문사의 중창을 기뻐하며<보문사법당중건기>를 작성해 주었다는 사실은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까지 전하는 자료만 본다면, 한영스님이 보문사와 어느 정도의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보문사에서 중창을 기념하는 글을 스님께 부탁했다는 사실, 그리고 스님이 그 청을 수락하고 흔쾌히 글을 써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보문사와 스님의 관계는 보통 이상이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영스님은 보문사의 역사 속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질 필요가 있으며. 여기서는 이 같은 점을 염두에 두면서 스님의 생애를 간략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한영스님은 1870년 8월 18일에 전북 완주군 초포면에서 태어났다. 성은 박씨였으며, 자(字)는 한영(韓永), 호는 영호(映湖) 또는 석전 (石顚)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박성용(朴聖鏞)이라는 함자를 가진 분이었으나 스님이 어렸을 때 이미 돌아가시고, 주 로 어머니 진주 강(姜)씨 밑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자 가세는 매우 빈한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스님의 어린시절도 동생들을 돌보며 농사일을 하는 등 매우 어려 웠다고 한다. 하지만 스님은 워낙 총명한 기질을 타고났으며, 그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학문에 게으름이 없었다. 그 결과 불과 17세의 어린 나이로 마을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 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렇게 성장하던 스님이 왜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스님이 17세가 되던 해(1886년)에 스님의 어머니께서 전주 위봉사(威鳳寺)에서 금산(錦山)스님에게 삶과 죽음에 관한 생사법문을 듣고 그 내용을 전해 주었으며, 스님이 그것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는 내용은 전해지고 있다. 이로 본다면 스님은 아마도 청년기에 어머니로부터 생사법문을 전해 듣고 곧바로 수행자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았을까 한다. 19세가 되던 1888년에 스님은 전주 태조암(太祖庵)으로 가서 금산스님을 은사로 하여 출가의 예를 마쳤다. 이때 받은 법명이 정호(鼎鎬)였다. 이어 21세에 장성 백양사(白羊寺)·운문암(雲門庵)의 환응(幻應)스님에게 4교(四敎, 능엄경·기신론 ·금강 경·원각경을 말함)를 배웠으며, 계속해서 23세에 선암사(仙巖寺)의 경운(敬雲)스님 에게 대교(大敎, 화엄경·선문염송·전등록 을 말함)를 배웠다. 그리고 26세에 순창 구암사(龜巖寺)의 처명(處明)스님으로부터 법을 이어 받았는데, 이때 영호(映湖)라는 호와 석전 (石顚)이라는 시호(詩號)를 함께 받았다. 특히 `석전'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백파(白坡)스님에게 후일 백파스님의 법손 가운데 도리를 아는 자가 있으면 이 호를 주라고 부탁했던 것인데, 그것이 계속 전해지다가 한영스님에 와서 시호로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대의 고승들로부터 상당한 칭송을 듣던 한영스님은 1896년에 구암사에서 강의를 시작한 후 대흥사·백양사·해인사·법주사· 화엄사·석왕사·범어사 등지를 거치면서 불법을 강론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에 불교유신의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 한용운· 금파(琴巴)스님 등과 더불어 불교유신운동을 펼쳐 가는데, 그 활동은 1911년이 되면서 본격화 된 다.
1910년의 한일합방 이후 이회광(李晦光)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승려와 일본인들 사이에 연합동맹이 체결되자. 스님은 만해스님 등과 함께 한국불교의 전통을 수호한 다는 취지로 임제종(臨濟宗)을 수립했던 것이다. 이후 스님은 1913년에 해동불교(海東佛敎)라는 잡지를 창간하면서 불교유신과 불교인의 자각을 촉구하는 글을 계속 발표하였다. 아울러 1914년부터는 본격적인 불교 교육사업에 매진해 나갔다. 1914년에는 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이 설립되어 이에 관계하였으며, 1916년에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이 설립되자 여기서도 강의를 하는 등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1926년부터 개운사 (開運寺)에 강원을 설립하여 이후 20여 년간 수많은 인재 를 배출해 냈으며, 1931년에는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 하기도 하였다. 그야말고 일제라는 암흑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을 교육 사업이라고 판단했던 스님의 뜻이 줄기차게 실행 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스님은 광복이 되자 이후 몇 년간 한국불교를 영도하는 최고의 자리를 맡게 된다.
광복 이후 새롭게 조선불교 중앙종무원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스님은 이 자리에서 게1대 교정(敎正)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이후 3년간 한국불교를 이끌어 가던 스님 은 세수 79세를 일기로 정읍 내장사(內藏寺)에서 입적하였다. 한영스님은 한국 근대불교사에 있어 큰 별과도 같은 존재였다.
일제에 끝까지 타협 하지 않았던 높은 기개는 물론이지만, 그분이 지녔던 학식의 폭과 깊이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탁월한 것이었다. 불교 이외에 역사·유학·노장사상·서법(書法) 등까지도 달통했던 한영스님이 남긴 글로는《석전문초(石顚文抄)》·《석전시초 (石 顚詩抄)》·《석림수필(石林隨筆)》·《석림초(石林抄)》 등이 있으며,《해동불교 》·《조선불교월보》등의 잡지에 실린 글도 상당수 전하고 있다.
아울러 최근에는 스님이 남기신 글을 모아《영호대종사어록(映湖大宗師語錄)》(동국출판사, 1988)이 라는 책자가 출간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