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나의 엄마! > 아름다운 이야기

참여마당


아름다운 이야기

선생님 나의 엄마!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보문사 작성일2016.01.21 조회5,553회 댓글0건

본문

 

      선생님, 나의 엄마!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임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뺑소니차에 당한 사고라 변변한 보상도 받지 못했고, 네 살 많은 누나와 저만 세상에 남겨졌습니다. 당장 갈 곳이 없어진 우리는 큰아버지 댁으로 보내졌습니다. 적은 액수였지만 부모님 앞으로 나오는 보험금이 있었는데 누나 이름으로 된 통장을 큰아버지가 관리한다고 가져가셨습니다 저희는 의지할 곳이 없었고, 너무 어렸기에 통장을 달라는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고 정신적 충격이 컸던 저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 했습니다 생각을 하고 뭐라고 말도 하고 싶은데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정신적인 문제라 꾸준히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큰아버지는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문제라면서 병원엔 데려가 주지 않으셨습니다 성격이 까칠했던 큰어머니는 집안에 머리카락 하나 뒹구는 것도 용납을 안 하는 분이라서 저와 누나가 들어온 후로 부쩍 신경이 남카로워지셨습니다 손에 테이프를 들고 다니면서 닦고 바깥에서 닦고 들어오게 하셨지요 큰아버지에게는 자식이 한 명 있었는데 저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외국으로 유학을 간 상태라 방이 비어 있었는데도 그 방을 어지럽히면 안 된다고 저와 누나는 다용도실로 쓰는 방을 사용했습니다 간혹 친척들이 다니러 오거나 손님이 오실 때만 그 방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지냈고, 손님들이 돌아가시면 바로 다용도실로 가야 했습니다 누나는 큰집에 들어가면서부터 식모살이를 했습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마당 쓸고 집안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매일 손빨래까지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일을 많이 하다 보니 누나는 코피를 자주 쏟았고 누나가 코피를 쏟으면 큰어머니는 더럽다고 난리를 치셨습니다 성적이 좋았던 누나는 점점 성적이 떨어졌고 "시험기간이라 학교에서 공부한다"고 하면 큰어머니는 "집안일은 누가 하냐?"며 노발대발 하셨습니다 "먹여주고 재워주면 밥값은 해야지 니가 안 하면 니 동생을 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기에 누나는 저 대신 그 많은 일을 다 해냈습니다 아직 말도 못하는 동생에게 힘든 일을 시키다 혹시 영원히 말을 못 하게 될까봐 누나는 저에겐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큰 아버지의 사업이 힘들어지자 누나와 저를 향한 못마땅한 시선은 더욱 심해졌고, 말끝마다 "고아원에 안 보내고 데리고 살아주는 걸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큰아버지는 점점 술 마시는 날이 늘어갔고, 유학 간 아이에게 돈을 부쳐줘야 하는데 왜 돈을 안 주느냐고 싸우는 일이 잦더니 큰어머니의 잔소리가 그치지 않자 술을 마시고 매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해 겨울날, 누나와 저는 온기 하나 없는 차가운 방에서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문이 열리더니 큰아버지가 들어와 허리에 매고 있던 허리띠를 풀어 우리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하도 맞으니까 누나가 제 앞을 가로막고 "왜 자꾸 때리느냐?"며 "이럴 거면 고아원으로 보내주라, 차라리 고아원에 가겠다" 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큰아버지는 "키워주는 은혜도 모르고 대든다"고 불같이 화를 내면서 누나를 무섭게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때리던지 누나가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있는 힘을 다해 "누나 때리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까지 속에서만 맴돌던 말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고, 큰아버지는 제가 말을 하는데 놀랐는지 때리는 걸 멈추고 방을 나갔습니다. 누나는 제가 말을 하자 너무 기뻐하면서 "집을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동안 말도 못 하는데 고아원에 가면 혹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까봐 누나는 꾹 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니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고아원에 가서 살자 어디를 가든 여기보다 나쁘기야 하겠냐?"며 그 밤에 누나와 저는 짐을 싸서 집을 나왔습니다. 고아원에 가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갈 수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경찰서에 찾아가 고아원에 보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경찰서에서 큰아버지한테 연락을 할까봐, 그래서 다시 큰집으로 가게 될까봐 저희들은 밤길을 오래 헤매야 했습니다. 누나는 고민을 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누나의 담임선생님이었던 분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누나한테 힘내라고 매일 전화해주고 챙겨주던 고마운 선생님이셨습니다. 누나가 전화를 하자 선생님은 멀리 지방에서 밤새 달려 저희가 있는 곳까지 와주셨습니다. 누나와 제 얼굴을 보더니 더 이상 말씀을 안 하시고 그냥 꼭 안고 목 놓아 우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선생님이 사는 집으로 데려가셨습니다. 누나는 선생님께 "고아원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으니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고, 선생님께서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자세히 말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큰집으로 가셔서 저희 짐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더러 "함께 살자"고 하셨습니다. "아들 딸 다 결혼해서 그동안 혼자 살기 적적했는데 너희가 함께 살아 주면 외롭지 않아 좋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은 저희 남매에게 엄마가 되어주셨습니다. 선생님을 엄마라 부르는 누나와 달리 저는 엄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쭉 선생님이라고 불렀고, 선생님도 편하게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누나와 제가 부모 없는 아이들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까봐 모든 면에서 소홀하지 않게 신경을 쓰셨습니다. 가족 모임이 있을 때도 저희들을 꼭 챙기셨고, 누나와 형들도 저희를 가족처럼 생각해 주셨습니다. 사춘기 시절, 제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방황을 하고 집을 나와 중국집 배달원으로 취직했을 때도 선생님은 수소문을 해서 저를 찾아와 "니가 이렇게 살면 내가 나중에 너희 친부모님을 어떻게 보겠느냐?"며 눈물을 흘리셨고, 제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매일 중국집 앞에서 저를 기다리셨습니다. 전 선생님이 고마우면서도 도움을 받는 제 입장이 너무 싫었습니다. 혼자 자립해서 살고 싶었습니다. 매일 저를 기다리던 선생님께서 학교 끝나고 저를 보러 오시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제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습니다. 친부모님도 교통사고로 잃었는데 저 때문에 선생님마저 돌아가시면 저는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병원에 가는 내내 '선생님이 살아만 계시면 앞으로 세상에서 제일 착한 아들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보니 선생님은 수술실에 계셨고, 다행히 목숨엔 지장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큰 수술이어서 석 달 동안 입원을 하셔야 했고, 그 기간 동안 저는 선생님의 간병을 해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속 썩인 것을 용서받고 싶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선생님은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고맙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새벽에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선생님을 화장실에 모셔다 드렸는데, 화장실을 나오면서 "잠을 깨워서 미안하다"는 말씀에 제가 "엄마는 아들한테 미안한 게 왜 이렇게 많으세요?" 제가 처음 뱉은 '엄마'라는 단어에 선생님이 또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셨고, 저는 그렇게 선생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선생님을 엄마라고 부릅니다. 이젠 퇴직을 하셔서 텃밭을 가꾸고 주말에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시는 엄마. 엄마가 안 계셨으면 저와 누나가 이만큼 바르게 자라지 못했을 겁니다. 공무원이 된 누나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 저. 저희들은 엄마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엄마가 제게 하신 것처럼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든든한 선생님으로 기억되려고 합니다. 그것이 엄마가 제게 주신 가장 큰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니까요. -- 감동실화 옮겨온 글 --

대한불교조계종 보문사 우)23007 인천시 강화군 삼산면 삼산남로 828번길 44 보문사Tel. 032) 933-8271~3FAX. 032) 933-8270

Copyright ⓒ 2022 bomuns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