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거 법어-시간낭비하지 말고 어서어서 해탈성불하여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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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문사 작성일2016.12.02 조회5,642회 댓글0건본문
혼신의 노력으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기 바라노라
종정예하 丙申年 동안거 결제법어
〔상당(上堂)하시어 주장자(拄杖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宗師驗人端的處<종사험인단적처>는
等閒開口便知音<등한개구변지음>이라.
覿面若無靑白眼<적면약무청백안>이면
宗風爭得到今日<종풍쟁득도금일>이리요.
종사(宗師)가 사람을 시험하는 단적처(端的處)는
한가로이 입을 엶에 문득 지음(知音)함이로다.
바로 면전을 대하여 청백안(靑白眼)이 없으면
어찌 종풍(宗風)이 오늘에 이름을 얻으리오.
모든 대중(大衆)들이여!
금일(今日)은 丙申年 동안거 결제일(冬安居 結制日)이라.
이 삼동구순(三冬九旬)의 결제기간동안 대중들이 모인 것은 모든 반연(攀緣)을 다 끊고, 시비분별을 내려놓고 오직 각자가 대오견성(大悟見性)을 위함이니, 대중들은 오로지 화두정진에만 몰두하여야 할 것이라.
이 일을 조금이라도 미루는 마음이 있다면 벌써 십만 팔천 리 나 어긋남이로다. 만약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 ‘이 달에 못하면 다음 달에 하지’ ‘금년에 못하면 다음 해에 하지’ 하는 생각이 마음 가운데 조금이라도 있다면 일생동안 허송세월을 보내게 됨이로다.
그러니 모든 대중은 이 한 철에 반드시 견성(見性)하리라는 각오로 일각일초(一刻一秒)도 허비하지 말고 화두와 씨름해야 할 것이라.
이 귀중한 시간, 오늘이라는 날은 다시는 오지 아니함이로다.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곧 시시각각 죽음의 문턱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니, 누구라도 마음광명을 밝히는 이 일을 소홀히 한다면 염라대왕의 추심(推尋)을 피할 길이 없음이로다.
그러나 이 일을 분명히 밝혀서 자기의 마음광명을 본 사람에게는 생사의 괴로움이라는 것이 원래 없는 법이로다.
그러니 모든 대중은 오직 마음의 빛을 돌이켜서 대오견성하겠다는 대발심(大發心)과 대용맹심으로 각자(各自)의 화두(話頭)를 성성(惺惺)하게 챙겨 화두(話頭)의심이 지속되게끔 혼신의 노력으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기 바라노라.
금생(今生)에 견성(見性)하지 못한다면 불견성법(佛見性法)을 어느 생(生)에 또 만날 수 있으리오.
자신을 돌아보고 돌아볼지어다.
화두가 있는 이는 각자의 화두를 챙기되, 화두가 없는 이는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인가?’하고 이 화두를 하루에도 천번 만번 챙기고 의심하고 의심할 지어다.
부처님께서 출세하신 이후로 무수한 도인(道人)들이 배출되어서 멋진 법거량(法擧揚)을 많이 하셨으나, 그 가운데에 다음의 세 대문(大文)을 들어서 모든 大衆에게 진리의 법문을 공양 올리니 잘 받아 가지소서.
옛날 중국(中國) 당(唐)나라시대에 한산(寒山)스님이 천태산(天台山)의 국청사에 살 당시에 풍간선사(豊干禪師)에게 물었다.
“옛거울(古鏡)을 닦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해야 빛을 비춥니까?”
풍간선사가 말하였다.
“빙호(氷壺)는 원래 그림자가 없거늘, 원숭이가 공연히 물속에 비친 달을 건지려 하는 것과 같구나.”
한산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그래도 아직 비추지 못했으니 스님께서 다시 일러 주십시오.”
풍간선사가 말하였다.
“만 가지 덕(德)을 가져오지 않았거늘 나에게 무엇을 이르라고 하는가?”
이 두 분의 문답이야말로 천추(千秋)에 빛나는 법거량(法擧揚)이로다.
또 일일(一日)에 암두선사(岩頭禪師)가 덕산(德山)방장스님께 참배(參拜)하러가서 방장실(方丈室)문을 열고는, 한 발은 방안에 들여놓고 한 발은 마루에 두고 묻기를,
“제가 성인(聖人)입니까? 범부(凡夫)입니까?”하니,
덕산선사가 석화전광(石火電光)으로 벽력같은 할(喝)을 하니, 암두스님이 아무 말 없이 큰 절을 하고 물러나왔다.
이렇게 사제지간(師弟之間)에 멋진 법담(法談)을 나누었다는 소문이 제방(諸方)에 분분했다. 그런 후에 세월이 흘러 동산선사(洞山禪師)에게 법담(法談)이 전해져서 듣고 말하기를, “암두전활(巖頭全豁) 상좌가 아니면 덕산선사의 할을 알아듣기 어려우리라.”라고 하셨다.
동산선사의 그 말을 암두스님이 전해 듣고는
“동산늙은이가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못하고 함부로 말을 하는구나.
덕산선사가 할을 할 당시에 내가 한 손은 들고 한 손은 내렸노라.”
라고 말했다.
대중들은 말해보라!
어느 곳이 한 손을 든 곳이며 어느 곳이 한 손을 내린 곳이냐?
정미년(丁未年. 1967년) 하안거 해제일에 묘관음사에서 산승(山僧)이
향곡선사(香谷禪師)를 찾아가 묻기를
“불안(佛眼)과 혜안(慧眼)은 묻지 않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衲僧)의 안목(眼目)입니까?”하니,
향곡 선사께서
“사고원래여인주(師姑元來女人做-비구니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니라)니라.”하시기에
“금일(今日)에야 선사님(禪師任)을 친견(親見)하였습니다.”라고 답하니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봤는고?”하셔서
“관(關)!”하고 대답하니,
“옳고, 옳다!” 하셨다.
사해오호(四海五胡)의 대중(大衆)들이여!
한산스님이 “옛거울(古鏡)을 닦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해야 빛을 비춥니까?”라고 한 대문(大文)과 덕산선사가 석화전광(石火電光)으로 벽력같은 할(喝)을 하니, 암두스님이 아무 말 없이 큰 절을 하고 물러나온 대문과 그리고 향곡선사께서 산승에게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봤는고?”하심에 “관(關)!”하고 대답한 이 세분 네 분의 문답처를 아시겠습니까?
이러한 법문(法門)의 낙처(落處)를 알 것 같으면 다른 어떠한 법문에도 바른 답이 흉금에서 흘러나와 여탈자재(與奪自在) 살활종탈(殺活縱奪)의 수완을 갖추고 억겁세월이 지나도록 진리의 낙을 수용하며, 불조(佛祖)와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어 불은(佛恩)에 보답하고 홀로 하늘과 땅에서 종횡하는 대장부의 활개를 치게 될 것이라.
[주장자(拄杖子)로 법상(法床)을 한 번 치시고 하좌(下座)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