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관(等觀): 모든 경계가 '한 마음'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평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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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문사 작성일2016.02.10 조회4,739회 댓글0건본문
수천만 년 동안 쌓여온 중생의 업(業)이 얼마나 무겁고 완고했으면, 부처님이래 수많은 선지식들이 그토록 '만법이 성품이 없어서 그 무엇도 실다운 것이 없음'을 한결같이 설파했음에도 불구하고, 급기야 이 시대를 말법(末法)시대라고까지 부르게 되었다.
이처럼 중생이 그 업의 무게에 짓눌린 채, 번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서, 현재의 마땅치 않은 바를 보다 바람직한 그 무엇으로 바꾸려하는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의 삶을 가만히 살펴보면 늘 이것을 저것으로 바꾸려는 시도로 점철되어 있다. 없음을 있음으로, 모름을 앎으로, 미혹함을 깨달음으로, 그래서 결국 지금의 꾀죄죄한 '나'를 훤칠하게 벗어난 '나'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 쉬지를 않는다. '만법이 여여(如如)하니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 소리는 그야말로 '공염불'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말로써가 아니라, 참으로 진지하고 깊은 참구를 통해 '만법이 성품이 비었다'는 사실이 마음 깊이 사무쳐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 중생이 그 근본 성품자리를 밝힐 수 있는 길은 없다.
1) 이 세상에는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고 나는 법은 없다.
2) 인연이 있어야만 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체로는 성품이 없는 것이다.
3)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법은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자체의 성품이 없는 것이다.
늘 언급되는 바이지만, 너무도 단순한 이 삼단논법을 그야말로 '단순하게' 흘려 넘겨버린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공부가 깊어질 수 없다. 소위 말하는 성불(成佛)할 분수가 없는 것이다.
만법이 자체의 성품이 없음을 밝혀서 문득 '법의 평등'을 얻으면, 거기엔 더 이상 안으로 '나'도, 밖으로 경계도 없을 터이니, 이것을 저것으로 바꾸는 일이 안 된다고 애태울 일이 본래 없는 것이다. 천태만상(千態萬象)이 모두 성품이 없으니 '한 성품'(一性)이요, '한 성품'이므로 평등(平等)한 것이니, 보고 듣는 가운데 분별 없이 무심히 대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 지혜가 나타나는 시절인 것이다.
범부도 성인도, 깨달음도 미혹함도, 생사도 열반도, 속박도 해탈도 그 모든 것이 원융(圓融)되어 문득 대원경(大圓鏡)에 들면, 그러한 낱낱의 차별상이 몽땅 하나의 거울에 비친 그림자일 뿐인 것이니, 더 이상 무엇을 헤아리고 더듬을 일이 있겠는가?
강물이 아직 바다에 들지 못했으면 짜지 않고, 나무가 아직 불에 들어가지 못했으면 타지 않은 것처럼, 모든 경계가 아직 '한 마음'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면 평등하지 않은 것이니, 다음 경(經)의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만약 대원경(大圓鏡)으로 거두면 만법이 모두 동일한 비춤인지라, 시·비(是非)가 함께 없어지고, 역·순(逆順)이 모두 같은 데로 돌아가서, 한 마음도 '부처 마음' 아닌 것이 없고, 한 일도 '불사(佛事)'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찰나 동안도 여래가 보리를 얻은 때가 아닌 것이 없고, 또한 티끌만큼도 보살이 신명(身命)을 버린 때가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또한 다음과 같이 경(經)에 이르고 있으니, 망령되이 이 그림자를 저 그림자로 바꾸기 위해 헐떡이는 일은 지금 당장 쉬어야 할 것이다.
『허망한 꿈속에 만가지 법이 있다고들 하나, 성품을 깨치고 나면 끝내 한 물건도 얻을 만한 것이 없음을 알리라. 여기에는 능히 설(說)하고, 능히 보이고(示) 할 만한 것도 없고, 또한 능히 듣고, 능히 얻을 만한 것도 없다.』
따라서 『범부로서 범부 자리에 떨어진 것이 아님은 미혹의 자리가 전혀 공(空)하기 때문이며, 모든 부처가 '진여의 문'(眞如門)을 증득하지 않는 것은 깨달을 때에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한 법도 끊을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은 생사에서 벗어날 문이 없기 때문이며,(生死가 그대로 涅槃이다) 한 법도 이룰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은 보리에 능히 들어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煩惱가 그대로 菩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