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생불멸의 세계로 나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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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문사 작성일2016.08.09 조회6,307회 댓글0건본문
不生不滅의 바다로 키를 돌려라
실로 三界는 무엇으로 인하여 허공에 떠돌면서 온갖 법풍을 이루고 있으며 인생은 무엇을 위하여 고뇌를 헤치면서 줄곧 생사를 엮으며 달리는가?
죽으려면 왜 낳았으며 낳았으면 왜 길이길이 삼계의 주인공 노릇을 하지 못하고 죽느냐는 말이다. 이렇다. 顯滅은 가짜요 不動은 진짜다. 진짜인 法身이 없으면 가짜인 色身은 나툼이 안되고 가짜인 色身을 나투지 않으면 진짜인 법신은 씀이를 굴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 곡절을 알면 진짜와 가짜는 둘이 아니므로 하여서 법신과 색신도 둘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은 곧 죽음이 아니요 낳음도 곧 낳음이 아니라, 죽음과 낳음은 한결같다고 이르는 것이니 어찌 삼계의 주인공인 인생에게 죽음이란 말귀인들 붙이겠는가 높은 고개로다! (9)
나날이 뚜렷함이여! 안 꺼지는 나날의 등불이로다. 그 性體는 휘영청이 밝아서 十方에 펴였고, 그 理量은 영특스리 밝아서 一 切에 잠겼으니, 이 迷함이냐, 이 깨침이냐! 泰山이 눈을 부릅떠서 오니 綠水는 귀를 가리고 가는 證處인지라 실로 너의 알뜰한 터전인 줄로 알라. (10)
싱그럽고 까마득한 본래의 슬기인 반야여! 앎이 아니면서 알지 아니함이 없고, 있음이 아니면서 있음 아님이 없고, 머뭄이 아니면서 머뭄 아님이 없으므로.. (11)
'이러히 내 들었노라'심은 世尊의 말씀대로 아난존자가 경을 결집하실 때의 머리말씀이시다. 존자의 그 말씀은 세존을 대로하시는 말씀으로서 절대로 不動的이요 불변적인 신빙성을 지니고 있는 法界의 참소식이니 일로 쫓아서 세존의 그 말씀은 西天에 차고 東方에 넘친 것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無邊虛空一句來하니 龜毛兎角滿乾坤이로다 번역하여 「가이없는 허공에서 한 구절 오니 거북털과 토끼뿔이 하늘과 땅에 가득함이로다」. 太初의 一句라 하여 두자. (28)
山은 山 水는 水 山水가 却來요
男은 男 女는 女 男女가 向去라
如是如是是如是
如是外別無如是
世人不知是如是
左往右往覓如是 (28)
修道人의 分으로는 無常한 幻想의 出沒을 바탕으로 하는 時空間의 분별이란 禁物이라겠다. (31)
상대性인 世間事는 절대性인 出世間事 위에서 이루어지는 幻像界련마는 이 의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깜양대로 幻身을 지어놓고 그 神에게 되돌아 의존하는 행위가 인간의 情念에서 우러나오는 宗敎觀인 것이다. (32)
실로 自力으로 굴리고 他力으로 굴리움도 오직 한 생각의 차이요 한 자국의 거리며 自力으로 살고 他力으로 살리임도 오직 한 생각의 차이요 한 자국의 거리언만은 이 확연한 이치를 사람 중에서도 知識人들이 더욱 모르고 지식인중에서도 宗敎人들이 더욱 모르니 상대的인 세간의 지식만으로는 절대性인 누리의 眞理를 밝혀내지 못한다고 斷言을 하여도 異論이 없을 것이다. (33)
한 생각을 크게 돌이켜서 죽어도 내가 죽고 살아도 내가 산다는 마음을 걷어잡음으로 하여금 自力으로 三世間을 꿰뚫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쩐 연고이냐. 애오라지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남이 있고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불보살이 계시고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三界가 벌어지면서 천당과 지옥도 나뉘는 만큼 나의 영원한 安住處도 또한 올바른 나의 行에 있기 때문이다. 이 行은 고집에 있음이 아니고 슬기에 있으며, 슬기는 얻음에 있음이 아니고 놓음에 있으며, 놓음은 하염있는 법에 있음이 아니고 하염없는 법에 있으면서 비추되 항상 적적하고 적적하되 항상 비춤으로 하여금 나의 성품 가운데 홀로 우뚝하고 의젓할 따름이니 남의 물건이 아니다. (33)
法身을 건질려면 먼저 그 성품을 맑히고 色身을 건질려면 먼저 그 마음을 닦아야 하거늘 나름대로의 知見解와 깜양대로의 有住行으로 말미암아 도깨비 굴을 향하여 달릴 뿐이니 다시 어느 때를 기다려서 人身을 얻고 제도를 받겠는가. (34)
佛法이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어디까지라도 세존의 말씀으로 밝히어진 온 누리의 참된 도리를 깨쳐 알기 위하여는 모든 보살과 조사들이 奉行하여 온 그 修行방편에 의지하되 자신의 슬기와 분발로 하여금 人生의 바탕을 파 헤치고 자신이 多劫에 이루어 놓은 六道의 수레바퀴를 걷어냄과 아울러 자신이 바로 불보살의 지위에 오르는 것만이 바라는 바의 究竟인 것이며, 이에 따라서 한없는 중생으로 더불어 하나도 빠짐없이 제도를 하는 것으로 원을 세움이 본래의 정신이니 어찌 미한 중생들의 봄, 들음, 깨침, 앎으로 하여금 상상조차나 되겠는가. 이러므로 自身의 깨침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와 他力에 의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와는 그 이념의 차이에 있어서 天地의 차이라면 그 果報의 거리에 있어서도 雲泥의 거리임을 덧붙여 둔다. (34)
세존은 탄생하시자마자 七步를 두루 거니시며 눈으로 四方을 돌아보시고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시며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 켜 이르시되 「하늘위와 하늘아래에 오직 내홀로 높으도다」이르셨으니 이 무슨 곡절인고! 어허! 보리수밑에 발가숭이가 三界를 누르고 一切을 걷어들이면서 人生을 宣言함이로다. 人生을 宣言함이여! 뭇 발가숭이들의 입이 반쯤은 열리고 반쯤은 닫치었네! 에익! 꿈 속의 일을 뉘와 더불어 말하려노! 앞에 석가없고 뒤에 미륵없는 것을! 옳커니 萬年綠水를 千里長江에서 들내어 보이시는 소식이로군! (36)
「도를 이룬다」는 절대의 보배는 효도와 충성과 의리로써 이루어진 순직하고 성실하며 정결한 그릇이 못되면 담기어지지 않음을 능히 알 수 있는 것이다. (40)
애오라지 부처님이 법의를 입으심은 참으로 입으심일까? 그러나 법의를 입으시지 않음도 아니며, 바리를 드심은 참으로 드심일 까? 그러나 바리를 드시지 않음도 아니며, 사위의 큰 성안으로 들어가심은 참으로 들어가심일까? 그러나 사위의 큰 성 안으로 들어가시지 않음도 아니며, 자리를 베풀어 앉으심은 참으로 앉으심일까? 그러나 자리를 베풀어 앉으시지 않음도 아님이로다. 히힛 若無空中月이면 安得千江月이리요. 이 무슨 소식일까? 動靜이 一如니 去來가 本寂인지라 어디에다 思議를 걸어 보겠는가. 참으로 드높은 고개로다. (41)
本源天眞이 당신이니까? 相好嚴身이 당신이니까? 舊來多親無面翁이나 有時吐舌論是非로다. 번역하여 「예로부터 알뜰하나 모습 없는 첨지련만 때를 둘세 혀를 내어 옳그름을 말하누나」 (43)
비롯도 없고 마침도 없으면서 똑똑하고, 움직임도 아니요 정지함도 아니면서 역력하고, 낳음도 아니요 죽음도 아니면서 뚜렷하고,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니면서 환하나, 方位도 內外도 大小도 數量마저도 일찍 없으면서 되돌아 다함없는 法輪이 굴리어지는 不可思議의 세계 속에서 수보리장로는 장로 自身만이 아니라 부처님을 비롯한 時會대중 천이백오십人도 頓悟無生인 空寂體중에서 제각기대로인 業緣대로 우뚝하심을 알기 때문이 아니실까. 옳으리라. 이 대목이야말로 부처님이 금강보좌에 앉으시어 太古때의 소식을 그대로 들어내시는 마당이니 어찌 장로로 하여금 우리의 귀에까지라도 쨍하게 들리도록 「드무십니다」라는 환호성이 터져 나오지 않겠는가! (51)
如如不動이여 照而常寂하고 혈혈回光이여 寂而常照로다. 번역하되 「의젓하여 안움직임이여 비추어서 항상 적적하고 오뚝하여 빛을 돌이킴이여 적적해서 항상 비춤이로다」(52)
○에다 답을 써넣어라. 初學들의 알뜰한 살림살이를 세우는 데 그 뜻이 있으니 조금도 오해를 말고 답이 나오거든 눈 밝은 이에게 인증을 받아라.
문 : 눈으로 보는 중생은 어디에 있습니까?
답 : 너의 ○○에 있느니라.
문 : 귀로 듣는 파순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답 : 너의 ○○에 있느니라.
문 : 혀로 이르는 부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답 : 너의 ○○에 있느니라.
문 : 혓바닥 속에 잇는 말씀을 한마디 던져 주십시오.
답 : 이것도 동그랑 땡 저것도 동그랑 땡 모두가 동그랑 땡이니 토끼뿔은 물속 달을 꿰었고 거북털은 배속 꿈을 털었느니라. (53)
妄心이 本空하니 塵境이 本寂한 줄을 알면 孤峯絶頂에 獨坐하여 天下人을 踏殺하리라. (53)
三界 九地의 중생은 모두가 淸淨心을 바탕으로 하는 수승한 열반妙心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때, 「내가 다 남김없이 열반에 들게 하여금 멸도하였느니라」시는 말씀이 부처님의 입밖에 떨어지기도 전에 三界 九地의 중생은 모두가 한 때에 부처를 이루는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59)
중생이 있음으로서 법이 있고 법이 있으므로서 멸도란 말귀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四相에 휘둘리면 중생이나 四相을 여의면 스스로가 부처임을 깨처 앎으로 하여금 멸도에 든다고 말씀을 던지신 것이니 실로 중생에게는 허공을 찢어내는 소식이라겠다. (60)
하늘사람과 땅 사람이 한 수레로 오고 옛 사람과 지금 사람도 한 가마로 가는구나! (60)
실로 세계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을 이른다면 허공을 지나지 못할 것이요. 성품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을 이른다면 불성을 지나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무릇 있는 바의 모습은 한정이 있음으로서 크다는 이름을 못 얻지마는 허공은 한정이 없음으로서 크다는 이름을 얻으며 온갖 성품은 나름대로의 분별이 있기 때문에 크다는 이름을 얻지 못하나 불성은 한량이 없는 까닭으로서 크다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허공 중에는 본래로부터 동서남북이 없건마는 만약 알이를 두어서 四方을 본다면 곧 이 모습에 머뭄인지라 해탈을 얻지 못할 것이요, 이 불성 중에는 본래로부터 我 人 衆生 壽子가 없건마는 만약 분별을 두어서 四相을 본다면 곧 이 중생의 지견인지라 열반을 얻어내지는 못하는 것이니 이 또한 住相行爲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69)
「머무름이 없는 데 머무름」이란 마음이 경계에 닿질림으로 말미암아 옳그름의 분별과 밉고움의 판단에 새김을 두지 않음이다. 또 다시 말하여서 머무름도 치우침이요 안머무름도 치우침이니 이 두 치우침에 걸거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여읨이 곧 「머무름 이 없는 데 머무름」인 참 소식이니 이 바로가 大道라 일컬으겠다. 어즈버야 대도는 머무름이 있고 머무름이 없는 데 탐착하여서 끄달리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하여금 허공 중에 이루어진 關東八景이 방해롭지 않으니 보고 듣고 깨치고 앎이 어찌 우리 집안의 풍속이 아니겠으며, 無住 중에 나투는 妙用道理가 방해롭지 않으니 빛깔 소리 냄새 맛 닿질림이 어찌 나의 놀음터가 아니겠는가 (70)
가이없는 虛空은 곧 가이없는 佛性이요, 가이없는 불성은 곧 가이없는 허공이니라. 여기에 만약 어리석은 사람이 있어서 허공이니 불성이니 이르는 이름에만 매어달려서 둘로 나눠 놓으려고 하여봤든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끌어잡고 허공과 불성을 나누겠느냐는 말이다. 이러므로 하여서 아무 모습도 없는 이 허공이 아무 모습도 없는 이 불성과는 둘이 아니니 너는 허공이란 이름도 버리고 불성이란 이름도 버린다음 한낱 너의 法性體인 줄로 알아라. (73)
탐하는 마음의 상대는 베푸는 마음이니 그 앞 소식은 淸淨心이요, 성내는 마음의 상대는 자비의 마음이니 그 앞 소식은 청정심 이요, 어리석은 마음의 상대는 똑똑한 마음이니 그 앞 소식은 청정심인 줄로 알고 한 생각을 고쳐잡아 三學을 닦음으로 하여금 法樂을 삼고 묘한 씀이를 굴린다면 탐하는 마음에서 온 欲界와 성내는 마음에서 온 色界와 어리석은 마음에서 온 無色界는 이름뿐인 욕계 색계 무색계이면서 이름뿐인 욕계 색계 무색계인지라 되돌아 탐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은 바로 佛淨土라 이르지 않겠는가. (74)
비추어서 항상 적적한 절대성을 바탕으로 적적하면서 항상 비추는 상대성을 씀이로 하면 보임 들음 깨침 앎이라서 어찌 참다운 깨달음이 아니겠으며 빛깔 소리 냄새 맛 닿질림이라서 어찌 참다운 법이 아니리요. 이렇듯이 참다운 깨달음으로써 참다운 법을 대한즉 六根은 스스럼없이 청정功德을 이루게 마련이니 大覺보리는 애오라지 너의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75).
「무룻 있는 바의 모습은 다 허망하니 모든 모습을 아닌 모습으로 보면 곧 여래를 뵈오리라.」이르셨다. 무릇 있는 바의 모습은 허망 無實한 것이라고 잘라서 말씀하신 것은 無相理를 높이 드러내신 소식이요 모든 모습을 아닌 모습으로 보면 여래를 뵈온다고 이르신 것은 아닌 모습 곧 非相은 모습 밖에 곧 相外에 있음이 아니니 여래님의 非身相도 그 身相 밖을 향하여서 뵈올 수는 없는 것임을 뜻하심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므로 하여서 色身을 여의어도 無染淸淨한 法身을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요, 법신을 여의어도 妙用 自在한 色身은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니, 어떻게 하면 여래님의 참 몸을 얻어 뵈옵겠는가? 한마디일러라. 알겠는가? 바로 이 소식處가 山은 山 水는 水! 山水가 却來요! 男은 男 女는 女! 男女가 向去라! 일컬으는 風光이다. 이래도 모르거든 허공을 향하여 일보를 내어 디디어라. 그곳에는 黃面老子가 빙긋이 웃고 계시리라. (80)
如來님의 眞身을 뵈오려면 여래님의 그 色身 밖을 향하여 뵈오려 하지 말고 그 색신을 통하여서 아닌 색신인 법신을 뵈옵는 줄을 알았으니 우리들 중생의 眞身을 보려면 또한 우리의 이 색신 밖을 향하여 보려고 하지 말고 이 색신을 통하여서 아닌 색신인 法身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81)
十善을 닦으면 人天報를 받거니와 그렇지 않고 한강 모래數의 三毒心이 뛰쳐나와서 놀아나면 거기에 응하여서 알맞은 탈을 스스로가 뒤집어쓰는 것이니 알지어다 어리석고 게으른 놈은 소나 말 따위로 태어나고 .. (84)
사람이란 본래로 끝이 없고 한이 없는 淸淨 自性을 간직하고 있는만큼 설혹 三毒의 먹구름이 덮혔다손치더라도 그 두껍고 얇음에 따라 알면서도 모르면서도 善根은 심기어지는 모양이다. 이 선근의 깊고 얇음에 따라 그 슬기의 높고 낮음도 나투게 마련이니 , 갓난 어린아이로 부터 늙고 병들어 죽은 다음 불구덩이가 아니면 흙구덩이를 향하여서 달릴 때 까지의 한낱 가죽주머니인 자신에 대하여 어찌 제 나름대로의 無常을 느끼지 앉겠는가. 이러히 無常을 느낌에 따라 한낱 가죽주머니로서의 색신은 幻化空身임을 느낄 것이요 환화공신임을 느낄 때 비로소 이 환화공신을 끌고 다니는 놈은 바로 무엇이냐는 의심덩이가 크게 쏟아져 나올 것 이다. 쏟아져 나오는 이 의심덩이가 돈독할 때 바야흐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여 들어서 믿고 그 말씀대로 행을 닦으며 갈 것이니, 이 소식處에서 無住無相의 참된 뜻을 실다이 證得하는 것이 法의 순서라 하지 않겠는가. (90)
趙州는 이르시되 「金佛은 화로를 제도하지 못하고 木佛은 불을 제도하지 못하고 泥佛은 물을 제도하지 못하거니와 眞佛은 안 속에 앉았느니라.」하셨으니 眞佛이 어찌 無位向上人이 아니며 三佛이 어찌 隨機 三身이 아니겠는가. (91)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가 다못 道에 드는 方便이기 때문이니 일단 방편에 의하여 道에 들었다면 그 방편은 마땅히 버려야 옳은 것이다. 그러니 방편인 法도 쾌히 버리는데 어찌 항차 非法인 아닌 법을 버리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시다. 이 소식에서 온갖 것을 다 놓으면 되돌아 온갖 것은 모두 내 것이 되는 소식이니 이러히 無上道는 전하여 지고 행하여져서 道가 이 땅에 끊어지지 않고 펴여짐을 뜻하심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95)
실로 如來의 理量이 원래로 圓滿하여서 空寂하기 때문에 身相을 두었고, 如來의 性智가 원래로 廣大하여서 靈通하기 때문에 心相을 두었으나 중생들은 無明의 가리움으로 말미암아 四大六身을 自身相으로, 六塵緣慮를 自心相으로 誤認錯覺하는데서 원만한 體와 영통한 用을 자재로이 굴리지 못하고 갖추어진 공덕을 물리치면서 재앙만을 거두어 들이는 셈이니 이 자리에서 回光返照하 라. 그리하여 我와 法을 아울러 잊어버리면 비로소 常見과 斷見도 여의면서 一味가 方現하는 最上乘 도리에 높이 앉으리니, 바야흐로 여래의 공덕을 찬양하면서 같이 가리라. 이 소식처인지라.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구나. 이 법이 있음이냐? 이 법이 없음이냐? 一心이 열리면 三智로 벌어진다더라. (95)
淸淨信者들은 我相을 여읨으로써 것은 빔과 다르지 않고 빔은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느낌 새김 거님과 알이도 그 當處가 비어서 고요적적함을 알기 때문에 마음은 항상 휘영청이 밝아서 번거롭지 않으니 천하가 태평일 것이요, 人相을 여읨으로서 四大가 본래로 허망하여 실답지 않으니 마침내 흙과 물과 불과 바람으로 돌아감을 알았기 때문에 시시털털한 五慾樂따위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요, 衆生相을 여읨으로써 生滅心이 본래로부터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生死 去來에 두려움이 없을 것이요, 壽子相을 여읨으로써 나라 일컬으는 몸이 허망하여 실답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끝이 없는 허공으로 더불어서 옳고 그르고 굽고 곧음이 없으매, 뫼가 높고 물이 낮음은 나의 손발이요, 바람이 불고 구름이 감돎은 나의 나들이요,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귐은 나의 놀음인지라 따로 상대할 삼계를 다시 어디에서 찾아보겠는가 말이다. (94)
부처님의 설법은 물위에 뜬 갈대배와 같이 부딪치면 굴려서 옮기듯이 無定法을 좋이 取하며 無定法을 좋이 說하시니 만약 定說이 있을진댄 어느 것이 有가 아니며, 만약 定說이 없을진댄 어느 것이 無가 아니리요. 이미 有 無法이 없을진댄 필경엔 이 무엇인가! 法을 이르고 非法을 이름이 다 옳지 않을진댄 필경에 이 무엇인가? 이래도 얻지 못하고 저래도 얻지 못하니 확연한 大虛空이라 새가 날아간 자취도 없구나. (104)
우선 第五의 如理實見分에서 말씀하신 「무릇 있는 바 모습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모습을 아닌 모습인 줄로 보면 곧 여래를 뵈올 것이니라」도 좋고 第十의 莊嚴淨土分에서 말씀하신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러히 청정한 마음을 내어 응당 빛깔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소리와 냄새와 맛과 닿질림과 요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지니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도 좋고, 第十八의 一體同觀分에서 말씀하신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이 다 마음이 아니요, 그 이름이 마음일새니라. 무슨 까닭이냐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당장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오는 마음도 얻을 수 없음이니라.」도 좋고, 第二 十一의 非說所說分에서 말씀하신 「수보리야, 여래가 중생을 중생이라 함은 중생이 아니요, 이 이름이 중생임을 말함이로다」도 좋고, 第二十六의 法身非相分에서 말씀하신 「만약 빛깔로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지라, 여래를 뵈옵지 못하리라」도 좋고, 마지막인 第三十二의 應化非眞分에서 말씀하신 「일체 하염있는 법은 꿈 같고 꼭두각시와 같고 거품같고 그림자같고 이슬같으며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러히 여겨볼지니라」도 좋으니 아무 구절이라도 마음에 들고 문맥이 잘 소화되는 것을 가려서 그 뜻을 밝혀 낸다면 우선 無我理에 통하고, 無我理에 통하면 따라 마음에 能緣과 所緣이 끊어지고, 마음에 能緣과 所緣이 끊어지면 다음엔 胸中이 落하여 맑고 깨끗하며 허공으로 더불어서 둘이 아님을 알게 될 것 이다 (115).
청정심은 무엇인가? 부처님 말씀따나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이르심과 같이, 빛깔을 보되 여의어서 머물지 아니하고 그 마음을 낳음은 智人의 마음씀이다. 빛깔에만 머물러서 그 마음이 굴리임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움 같고, 빛깔에 머 무름 없이 그 마음을 굴림은 허공에 구름이 거침과 같음이니 마음의 달은 길이 빛을 놓을 것이다. 浮雪居士도 노래를 부르시되 「눈으로 보는 바가 없으니 판가름이 없고 귀는 들음에 소리가 없으니 옳그름이 끊어졌구나. 판가름과 옳그름을 모두 놓고 다만 마음부처를 보아서 스스로 귀의할 뿐이로다.」하셨으니 그 마음씀이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이렇듯이 道人은 눈으로 보되 그 보는 바에 휘둘리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판가름이 사라지고 귀로 듣되 그 듣는 바에 휘둘리지 않음으로 하여금 옳그름이 끊어졌으므로 되돌아서 온갖 법의 판가름과 옳그름을 잘 처리하되 붙이지 않고 머물지 않은 것이니 이 當處인지라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시는 소식이라 하겠다. (136)
佛이라면 형상과 사리를 이름이 아니고 眞理를 이름인 것이다. 圓明하고 심寂한 청정법신을 일컬음이다. (156)
이 경의 소식이야 말로 물로 능히 적시지 못하고, 불로 능히 태우지 못하나 천번 변하고 만번 변하여도 변하여서 가지 아니하여 물건마다 응하고 천변 변하고 만번 변하여도 변하여서 또한 오지 아니하여 물건마다 응하니 情識으로 이를 바 아니며, 思量으로 용납할 바 아닌 文字性까지라도 빈 금강반야바라밀다인 소식이다. (162)
모습이 모습 아니니 또한 부처도 부처가 아니요. 이러히 있음과 없음을 갖추어 세우지 않는데 이러히 天眞面目인 부처는 호올로 나투는 것이다. (165)
모든 法이 本空임을 알고 經義를 요달하여서 生死想을 쓸어내면 겁내고 두려운 생각이 사라질 것이니 참으로 드뭄이라 이르지 않겠는가. 무슨 까닭으로써이냐 본래로 父子가 同氣이니 또한 同家인지라 어찌 일찌기 놀래고 겁내고 두려움인들 따로 있겠는가 (178)
諸相이 本空하니 無生에 머물 것이요 衆生이 本寂하니 無生을 제도하여야 할 것이다. 무슨 뜻인가 모습이 곧 모습이 아니므로 낳음도 곧 낳음도 아니요 죽음도 또한 죽음이 아니니 생김도 아니고 꺼짐도 아닌 그 당처를 가르치심이다. 다시 말하자면 人我 가 不生하고 覺照가 不滅함이니 이것이 바로 不住에 머뭄이요 無生을 제도함이 아니겠는가 이 소식이 여래의 本領이요 여래의 本心이시니. .(180)
이 마음이 法性面으로는 無邊法身인 여래지마는 用相面으로는 無盡衆生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알아내기란 지극히 어려운 것이니 세상 사람은 이 마음이 앞 경계에 부딪쳐서 굴리이고 뒷 경계에 끄달려서 굴리일 때마다 변하고 또 다시 변하면서 뛰쳐 나오는 識인 알이를 그릇 인정하고 마음이라 고집을 한다. 이 알이인 妄心은 앞의 생각과 당장의 생각과 뒤의 생각이 엇갈리고 섞갈리면서 흘러가는데 생각생각이 일어나고 꺼짐이 정지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천만갈래의 차별心數를 낳아 놓는다. 이 차별心數을 가리켜 들뜬 마음이니 삿된 마음이니 망녕된 마음이니 따위로 표현하는 뭉치마음이지마는 여기에서 한 생각을 일으키되 찰라에도 생기는 새김과 꺼지는 새김을 두지 아니하고 다시 생기고 꺼짐을 없애려고도 않음을 이름하여 非心인 「아닌 마음」이라 하며 이미 생기고 꺼짐을 좋이 없앨 것도 없음일진댄 오직 묘하게 맑고 뚜렷이 밝은 마음이 항상 머물러서 꺼지지 아니함을 眞心 곧 참마음이라 이른다 이렇듯이 숱한 뭉치마음의 그 當處를 알고 한 생각을 뛰칠 때 이 바로가 곧 眞心이요 이 바로가 곧 常心이요 이 바로가 곧 佛心이요 이 바로가 곧 반야바라밀다心인 것이다. (222)
古人도 이르시되 莫言空打坐하라 勝別勞心이로다 번역하여 「퍼질러 앉음만을 말하지 말라 오히려 따로 마음을 굴림이 나으리라] 하신 것이다. 실로 有爲가 비록 거짓이라 겠지마는 버린즉은 功行을 이루지 못하고 無爲가 비록 참이라겠지마는 헤아린 즉 聖果를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니 福慧雙修가 大道의 基本임을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231)
문) 어찌하여 괴로움과 슬픔의 중생이 있습니까?
답) 괴로움은 즐거움의 상대요 슬픔은 기쁨의 상대요 중생은 부처의 상대이니, 즐거움을 따로 구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고 기쁨을 따로 찾기 때문에 슬픔이 생기고 부처를 따로 바라기 때문에 중생이 생기는 것이니, 너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놓고 슬픔과 기쁨을 버리고 중생과 부처를 여의면 비로소 참 즐거움과 참 기쁨과 참 부처를 이루리라. 왜 그러냐면 괴로움과 즐거움이 비록 둘이나 그 뿌리는 오직 하나이니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까닭이요, 슬픔과 기쁨이 비록 둘이나 그 뿌리는 오직 하나이니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까닭이요, 중생과 부처는 비록 둘이나 그 뿌리는 오직 하나이니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까닭이다. 이렇듯이 하나인 절대性의 진리를 깨치지 못하고 둘인 상대性의 幻相에만 사로잡히면 도깨비 굴에 떨어진다. (249)
이 법은 평등하다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머리가 있고 손 발이 있어서 그 맡은 바 事實을 履行한다.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학다리는 길고 오리다리는 짧아서 맡은 바 生涯를 처리한다.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녹음이 짙고 가을이면 단풍이 붉고, 겨울이면 눈이 내려서 맡은 바 時節을 整理한다.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뫼는 높으니 높은데 맡기고 물은 낮으니 낮은데 맡겨서 造化의 妙를 가져온다.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부처는 미하여 중생이 되고, 중생은 깨쳐 부처를 이루며 간다. (261)
實로 죽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보통 마음의 씀이로는 안된다. 그야말로 三世間을 꿰뚫어서 生死關을 뛰어넘는 妙機를 주무르는 데 있는 것이니, 어찌 安逸을 꾀하고 趣味를 살리고 知識 넓히는 수단과 방편만으로서 이 문제가 다뤄질까 보냐. (182)
本來 無一物은 육조대사의 물건이요 本來 無一物이라 함도 틀린 것은 懷讓禪士의 물건이요 본래 무일물이라고 함도 틀린 것이 아님은 나의 물건이다. (184)
이 경전의 공덕은 性中의 煩惱가 쉬고 心中의 我所가 끊어진 無爲法이기에 그만 그대로가 虛徹靈通한 佛心인지라 三世間을 꿰뚫 어서 生死를 오로지 여의는 소식이므로 그 理는 뚜렷하고 그 事는 평탄하고 그 道는 지극하니 非相으로서 實相을 삼고 非般若로 서 實般若를 삼는 불가사의 不可稱量의 가없는 功德性과는 비유가 아니되기 때문이다. 이 功德性인지라 혓머리가 떨어졌으니 좋이 들내지 못하며, 마음뿌리가 끊겼으니 좋이 일컬으지 못하며, 있고 없음이 망하였으니 좋이 재지 못하며, 착하고 악함이 쉬었 으니 좋이 나투지 못하는 當處로서 內外가 비어서 時空이 없으니 魔法과 佛法이 자취를 감추었고 上下가 비어서 中間이 없으니 正道와 邪道가 판가름을 여읜 消息處가 아닐까 보냐. 이 消息處인지라 바로 한 주먹으로 幻化城을 무찌르고 한 다리로 玄妙關을 뒤집으니, 어즈버야! 乾坤이 失色이요 日月이 無光이로다. (189)
부처님께서는 無我法에 통달하여야 참 보살이라 이르신 것이니 이럴진댄 되돌아서 참 보살님을 어디서 만나 뵙겠는가 실로 얻는 바의 마음이 있으면 三界를 다 뒤져도 못 만나 뵙는다. 그러나 얻는 바의 마음이 없으면 뜰 앞에 핀 꽃잎에서도 만나 뵙고 시냇가에 흐르는 물소리에서도 만나 뵙고 뿐이랴 글귀와 말마디에서도 만나 뵈옵느니라 알겠는가 이 소식인지라 허공이 내려앉으니 속히 거두어 들여라. (212)
「머뭄없이 머뭄」을 행하면 하늘눈 슬기눈 법눈은 물론이요 부처눈까지 얻는다. 그러나 찾으려면 天下를 휘돌아도 안된다. 왜 그런가? 찾는 그놈이 그놈이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부처님은 그 다섯눈의 당처를 밝히시기 위하여 恒河沙數의 恒河沙數인 세계를 비유하심은 중생이 다 恒河沙數의 그 恒河沙數인 뭉치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뭉치마음은 다섯눈을 조종하는 主宰者이다. 이 뭉치마음이 能所緣에 휘둘려서 천만갈래로 굴리이나 그 當處는 하나이다. 하나인 마음은 萬人이 같으므로 如來心이라서 더하고 衆生心이라서 덜함이 없는 하나로서 춤도 추고 싸움도 한다. 惡種을 심어서 지옥도 꾸미고 善種을 심어서 천당도 세운다. 이 마음은 가없는 허공으로 더불어 비롯이 없고 마침도 없이 휘영청이 밝으나, 들뜨기 시작하면 한이 없는 뭉치마음으로 변하면서 굴리는 경계에 따라 강물이 흘러내리듯이 일초의 끊임도 없이 그대로 계속하여 쏟아진다. 만약에 이 뭉치마음이 쉴 때가 있다면 이것은 까무러칠 때와 잠을 잘 순간일 것이라 하여두기로 하자. (221)
生死業을 녹여 냄과 아울러 나의 몸을 三界에 우뚝이 나투는 데는 슬기로운 수단과 방편이 절대로 따르기 마련이니 고인도 이르시기를 「다만 作福할 줄만 알고 性空함을 해득하지 못함은 새의 한쪽 날개가 부러짐이요, 다만 性空함을 볼 줄만을 알고 作福할 줄을 해득하지 못함은 수레의 한쪽 바퀴가 떨어짐과 같느니라.」하셨으니, 이는 大道로 더불어서 서로 계합이 안됨을 뜻함인 것 이다. 그러나 그 둘을 비교할 때 觀空者는 作福者의 따를 바가 못될 만큼 수승하지마는 금상첨화를 이루려면 作福도 따르게 마련 이니, 이러므로 고인도 이르되 「莫言空打坐하라. 猶勝別勞心이로다」번역하여 「퍼질러 앉음만을 말하지 말라. 오히려 따로 마음을 굴림이 나으리라」하신 것이다. 실로 有爲가 비록 거짓이라 하겠지마는 버린즉은 功行을 이루지 못하고, 無爲가 비록 참이라겠지마는 헤아린즉 聖果를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니, 福慧雙修가 大道의 基本임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231)
最上乘 道理인 이 經을 통하여서 결사적인 정진에 뛰어드는 것만이 무량공덕을 쟁취하는 수단이요 방편으로서 어찌 삼천대천 세계의 칠보보시의 복덕行이 이를 따르겠는가 말이다. 어즈버야 心地一片月은 照破三千界로다 번역하여 「마음자리의 한 조각달은 삼천계를 비추어 뚫었도다」어찌 슬기밖의 일에 마음을 던질까보냐 (273)
만약 여기에 미련한 고집장이가 있어서 비록 진실로 내가 있음을 주장할지라도 그 성품은 當處가 비어서 모습이 없으므로 하여금 어디에서 무엇을 끌어 잡고 내가 있음을 내세우며, 만약 法身으로부터 이루어진 나의 色身이 있다면 이 색신은 흰핏톨과 붉은 핏톨로 뭉쳐진 세포의 가죽주머니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이나 이 흰핏톨과 붉은핏톨 따위는 줄곧 죽고 생김의 연속으로 일정한 모습이라고는 없는데 그 무엇을 기준하여서 내라고 자신있는 장담을 하겠는가. 까닭에 뒤바뀐 생각을 가진 凡夫로서 비록 내가 있음을 우겨댄다손 치더라도 이 범부相도 또한 적멸인 것이요 범부상이 적멸이기 때문에 범부는 범부가 아니고 이 이름이 범부일 따름인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므로 古人도 이르시기를 前念 不覺을 이름하여 범부라 이르고 後念 卽刻을 이름하여 범부가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278)
문: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을 가리키심이니까
답: 뱀이 대통에 들어서 가는 소식이로다
문: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물었는데 어찌하여 뱀이 대통에 들어서 가는 소식이라 하십니까
답: 너는 어찌 한 빛깔이 그 한 빛깔 가운데 있지 아니하고 한 구절이 그 한 구절밖에 있음을 모르느냐.
문: 어리둥절 합니다.
답: 무엇이 어리둥절 하느냐. 方位가 없으므로 하여금 능히 方位를 두고, 去來가 없으므로 하여금 능히 去來를 두는 것이니, 「본래로 검지도 희지도 않으나 곳에 따라 푸르고 누름을 나투네」이르는 의취이기도 하다.
문: 더욱 답답할 뿐입니다.
답: 너는 오로지 어리둥절하고 답답한 것만을 끌어 잡고 뒹구는구나. 단단히 들어라.
石男이 밑빠진 바리의 밥을 먹으니 「도솔을 여의지 않으시고 이미 왕궁에 오셨으며,
木女가 줄없는 거문고를 뜯으니 「어머니의 태를 나오시지 않으시고 이미 중생을 건져
마치시다」이르신 소식이기도 하니 알몸으로 달려들어서 이 문제를 처리하라. (279)
古人도 이르시기를 봄·들음·깨침·앎에 속하지도 않고 또한 봄·들음·깨침·앎을 여의지도 않는 것이라니, 봄·들음·깨침· 앎에 나아가서 구하여도 틀리며 봄·들음·깨침·앎을 떠나서 구하여도 또한 틀릴진대 어떻게 함으로써 여래님을 몸소 뵈옵겠는가? 별다른 소식이 따로 없다. 다만 소리와 빛깔에 쏠려서 새기지 말고 그만 그대로 쓰면 그만인걸! 다만 봄·들음·깨침·앎 이 참이 아니어늘, 그 봄·들음·깨침·앎에 쏠려서 얽히지 아니하고 그만 그대로 쓰면 그만인걸! 알겠는가? 이 곳인지라 한 발자국이 틀리면 그대로 邪道에 떨어지는 갈림길이니 입을 봉하자. 불씨가 하늘 밖으로 튀니 눈은 별가으로 가는구나. 에익! 이래도 모르겠거든 봉래산 꼭대기의 탕건바위에게 물어보아라. (288)
去來가 本寂하고 動靜이 一如하기 때문에 山河와 木石과 禽獸 따위의 모든 모습이나 善惡과 正邪와 憎愛 따위의 온갖 법이 應然 함으로 말미암아서 남자는 남자이면서 여자와 통하고 여자는 여자이면서 남자와 통하고, 부처는 부처이면서 중생과 통하고 중생은 중생이면서 부처와 통하고, 늙음은 늙음이면서 젊음과 통하고 젊음은 젊음이면서 늙음과 통하니 性別間에 迷悟間에 老小間에 안통함이 없고, 큼은 큼이면서 작음과 통하고 작음은 작음이면서 큼과 통하고, 넓음은 넓음이면서 좁음과 통하고 좁음은 좁음이면서 넓음과 통하고, 김은 김이면서 짧음과 통하고 짧음은 짧음이면서 김과 통하니 大小間에 廣狹間에 長短間에 통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럴진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에 가름이 생기지 않을 것이요 입을 열고 혀를 굴림에 새김을 달지 않을 것이니 이 바로가 밝은 거울에 물건이 비치고 빈 골에 소리가 응함같아서 비치고 응함도 스스럼없이 확연하지 않겠는가 (306)
여래의 法性身은 모습이 아니나 모습이 아님도 아니므로 性相이 如如하여 動靜이 不二인 當處이니 이른바 여래는 옴이 아니나 오지 아니함이 아니고, 감이 아니나 가지 아니함이 아니고 앉음이 아니나 앉지 아니함이 아니고 누움이 아니나 눕지 아니함이 아니므로써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는 四威儀中에 항상 空寂性을 여의지 않으심을 여래라 이르겠다. 천변 변하고 만번 변하나 변하여 가지 않으니 이 바로 밑빠진 바리의 밥을 먹는 소식이요, 천변 변하고 만번 변하나 변하여 오지 않으니 이 바로 줄없는 거문고의 소리를 듣는 소식이다. 이렇듯이 청정하고 이렇듯이 담적하면서 妙用이 自在하나 그 실다움을 글로 좋이 쓰지 못하고 말로 능히 이르지 못하고 물감으로 감히 그리지 못하고 흙으로 몸소 만들지 못하니 이른바 말길이 끊어졌고 마음길이 꺼진 그 자리인지라 애오라지 청정법신이신 비로자나佛의 얼굴에 봄바람이 가득한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13)
지옥이 妄心이면 천당도 妄心이네.
뱀이 대통에 들어서 갈 때 남은 한라산이요 북은 백두산일러라. (330)
「온갖 하염있는 법이 꿈과 꼭두와 거품과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는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러히 관할지어다」부처님은 이러히 게를 읊으셨다. 옳기는 옳은 말씀이나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法界體를 모습에서 취하지도 못하면서 「의젓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이르실까. 온갖 有爲化演法이 法界를 여의면 자체相없음이 앞 노래의 비유와 같이 究竟位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 당처인 절대성자리가 의젓하기 때문에 「응당 이러히 관할지어다」일컬으심이니 千萬古의 眞理를 들내심이라 하겠다. 이렇듯이 모습에서 취하지 아니함이란 三相에서 취하지 않음을 뜻함인데 眞如自性은 非有相이며 非無相이며 非非有相이며 非非無相이기 때문 에 常見을 부수시기 위하시어 一切의 空을 말씀하셨고 斷見을 부수시기 위하시어 一切의 有를 말씀하셨고 二邊에 떨어짐을 두려 워하시어 不空 不有를 말씀하신 것이니 이 다 緣을 대한 꾸밈새로 알지언정 言句나 字句 自體가 究竟은 아님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러므로 말미암아서 一切法이 다 緣으로 좇아 일어남으로 하여금 有爲法에 속한다 이르겠지만 그러나 그 당처가 비어서 모두 그 자체없음이 꿈은 셈으로 인하여 꾸나 그 자체가 없고 꼭뚜는 착각으로 인하여 생기나 그 자체가 없고 거품을 물로 인하여 일어나나 그 자체가 없고 그림자는 형체로 인하여 나투나 그 자체가 없음같이 위로는 부처님네로부터 아래로는 땅강아지나 개미에 이르기까지 凡聖의 因果等法이 실답지 않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자체는 실답지 않다 할지라도 法法이 서로가 모르면 서도 서로가 엉클리어져서 또다시 다른 法으로 줄곧 변하면서 가기 때문에 凡聖의 因果法은 어둡지 않다고 이르는 것이니 인생살이란 한낮 요지경 속이라 하겠다. (344)
본래하나 없는곳에 山河大地 나퉜구나
山河大地 부수어서 뭉쳐내니 한덩인걸
난데없는 파랑새가 납죽주어 먹더구나 (351)
人生문제를 다루는 學人들은 이 다섯갈래 중에 어느 쪽을 택함으로써 父母未生前의 면목을 접하겠는가 이 당처의 소식을 모르고 는 臨終때에 사람들이 울부짖어 봤던 이 몸을 代行은 못할 것이며 죽은 뒤에 곳곳마다 비석을 세워 봤던들 冥途의 방향을 틀어 놓지는 못할 것이다. 古人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올바른 修行만 가지면 大根은 三日안에 中根은 三個月안에 下根은 三年안에 見性成道를 할 뿐 아니라 그 功德으로 九族이 하늘에 나느니라! 만약 이것이 거짓이면 내가 대신 지옥에 가겠다」하셨다니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인생 문제의 해결은 제각기의 수행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니 人身을 받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不生不滅의 바다로 키를 돌려라.
(금강경 강송에서 발췌)
실로 三界는 무엇으로 인하여 허공에 떠돌면서 온갖 법풍을 이루고 있으며 인생은 무엇을 위하여 고뇌를 헤치면서 줄곧 생사를 엮으며 달리는가?
죽으려면 왜 낳았으며 낳았으면 왜 길이길이 삼계의 주인공 노릇을 하지 못하고 죽느냐는 말이다. 이렇다. 顯滅은 가짜요 不動은 진짜다. 진짜인 法身이 없으면 가짜인 色身은 나툼이 안되고 가짜인 色身을 나투지 않으면 진짜인 법신은 씀이를 굴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 곡절을 알면 진짜와 가짜는 둘이 아니므로 하여서 법신과 색신도 둘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은 곧 죽음이 아니요 낳음도 곧 낳음이 아니라, 죽음과 낳음은 한결같다고 이르는 것이니 어찌 삼계의 주인공인 인생에게 죽음이란 말귀인들 붙이겠는가 높은 고개로다! (9)
나날이 뚜렷함이여! 안 꺼지는 나날의 등불이로다. 그 性體는 휘영청이 밝아서 十方에 펴였고, 그 理量은 영특스리 밝아서 一 切에 잠겼으니, 이 迷함이냐, 이 깨침이냐! 泰山이 눈을 부릅떠서 오니 綠水는 귀를 가리고 가는 證處인지라 실로 너의 알뜰한 터전인 줄로 알라. (10)
싱그럽고 까마득한 본래의 슬기인 반야여! 앎이 아니면서 알지 아니함이 없고, 있음이 아니면서 있음 아님이 없고, 머뭄이 아니면서 머뭄 아님이 없으므로.. (11)
'이러히 내 들었노라'심은 世尊의 말씀대로 아난존자가 경을 결집하실 때의 머리말씀이시다. 존자의 그 말씀은 세존을 대로하시는 말씀으로서 절대로 不動的이요 불변적인 신빙성을 지니고 있는 法界의 참소식이니 일로 쫓아서 세존의 그 말씀은 西天에 차고 東方에 넘친 것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無邊虛空一句來하니 龜毛兎角滿乾坤이로다 번역하여 「가이없는 허공에서 한 구절 오니 거북털과 토끼뿔이 하늘과 땅에 가득함이로다」. 太初의 一句라 하여 두자. (28)
山은 山 水는 水 山水가 却來요
男은 男 女는 女 男女가 向去라
如是如是是如是
如是外別無如是
世人不知是如是
左往右往覓如是 (28)
修道人의 分으로는 無常한 幻想의 出沒을 바탕으로 하는 時空間의 분별이란 禁物이라겠다. (31)
상대性인 世間事는 절대性인 出世間事 위에서 이루어지는 幻像界련마는 이 의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깜양대로 幻身을 지어놓고 그 神에게 되돌아 의존하는 행위가 인간의 情念에서 우러나오는 宗敎觀인 것이다. (32)
실로 自力으로 굴리고 他力으로 굴리움도 오직 한 생각의 차이요 한 자국의 거리며 自力으로 살고 他力으로 살리임도 오직 한 생각의 차이요 한 자국의 거리언만은 이 확연한 이치를 사람 중에서도 知識人들이 더욱 모르고 지식인중에서도 宗敎人들이 더욱 모르니 상대的인 세간의 지식만으로는 절대性인 누리의 眞理를 밝혀내지 못한다고 斷言을 하여도 異論이 없을 것이다. (33)
한 생각을 크게 돌이켜서 죽어도 내가 죽고 살아도 내가 산다는 마음을 걷어잡음으로 하여금 自力으로 三世間을 꿰뚫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쩐 연고이냐. 애오라지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남이 있고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불보살이 계시고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三界가 벌어지면서 천당과 지옥도 나뉘는 만큼 나의 영원한 安住處도 또한 올바른 나의 行에 있기 때문이다. 이 行은 고집에 있음이 아니고 슬기에 있으며, 슬기는 얻음에 있음이 아니고 놓음에 있으며, 놓음은 하염있는 법에 있음이 아니고 하염없는 법에 있으면서 비추되 항상 적적하고 적적하되 항상 비춤으로 하여금 나의 성품 가운데 홀로 우뚝하고 의젓할 따름이니 남의 물건이 아니다. (33)
法身을 건질려면 먼저 그 성품을 맑히고 色身을 건질려면 먼저 그 마음을 닦아야 하거늘 나름대로의 知見解와 깜양대로의 有住行으로 말미암아 도깨비 굴을 향하여 달릴 뿐이니 다시 어느 때를 기다려서 人身을 얻고 제도를 받겠는가. (34)
佛法이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어디까지라도 세존의 말씀으로 밝히어진 온 누리의 참된 도리를 깨쳐 알기 위하여는 모든 보살과 조사들이 奉行하여 온 그 修行방편에 의지하되 자신의 슬기와 분발로 하여금 人生의 바탕을 파 헤치고 자신이 多劫에 이루어 놓은 六道의 수레바퀴를 걷어냄과 아울러 자신이 바로 불보살의 지위에 오르는 것만이 바라는 바의 究竟인 것이며, 이에 따라서 한없는 중생으로 더불어 하나도 빠짐없이 제도를 하는 것으로 원을 세움이 본래의 정신이니 어찌 미한 중생들의 봄, 들음, 깨침, 앎으로 하여금 상상조차나 되겠는가. 이러므로 自身의 깨침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와 他力에 의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와는 그 이념의 차이에 있어서 天地의 차이라면 그 果報의 거리에 있어서도 雲泥의 거리임을 덧붙여 둔다. (34)
세존은 탄생하시자마자 七步를 두루 거니시며 눈으로 四方을 돌아보시고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시며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 켜 이르시되 「하늘위와 하늘아래에 오직 내홀로 높으도다」이르셨으니 이 무슨 곡절인고! 어허! 보리수밑에 발가숭이가 三界를 누르고 一切을 걷어들이면서 人生을 宣言함이로다. 人生을 宣言함이여! 뭇 발가숭이들의 입이 반쯤은 열리고 반쯤은 닫치었네! 에익! 꿈 속의 일을 뉘와 더불어 말하려노! 앞에 석가없고 뒤에 미륵없는 것을! 옳커니 萬年綠水를 千里長江에서 들내어 보이시는 소식이로군! (36)
「도를 이룬다」는 절대의 보배는 효도와 충성과 의리로써 이루어진 순직하고 성실하며 정결한 그릇이 못되면 담기어지지 않음을 능히 알 수 있는 것이다. (40)
애오라지 부처님이 법의를 입으심은 참으로 입으심일까? 그러나 법의를 입으시지 않음도 아니며, 바리를 드심은 참으로 드심일 까? 그러나 바리를 드시지 않음도 아니며, 사위의 큰 성안으로 들어가심은 참으로 들어가심일까? 그러나 사위의 큰 성 안으로 들어가시지 않음도 아니며, 자리를 베풀어 앉으심은 참으로 앉으심일까? 그러나 자리를 베풀어 앉으시지 않음도 아님이로다. 히힛 若無空中月이면 安得千江月이리요. 이 무슨 소식일까? 動靜이 一如니 去來가 本寂인지라 어디에다 思議를 걸어 보겠는가. 참으로 드높은 고개로다. (41)
本源天眞이 당신이니까? 相好嚴身이 당신이니까? 舊來多親無面翁이나 有時吐舌論是非로다. 번역하여 「예로부터 알뜰하나 모습 없는 첨지련만 때를 둘세 혀를 내어 옳그름을 말하누나」 (43)
비롯도 없고 마침도 없으면서 똑똑하고, 움직임도 아니요 정지함도 아니면서 역력하고, 낳음도 아니요 죽음도 아니면서 뚜렷하고,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니면서 환하나, 方位도 內外도 大小도 數量마저도 일찍 없으면서 되돌아 다함없는 法輪이 굴리어지는 不可思議의 세계 속에서 수보리장로는 장로 自身만이 아니라 부처님을 비롯한 時會대중 천이백오십人도 頓悟無生인 空寂體중에서 제각기대로인 業緣대로 우뚝하심을 알기 때문이 아니실까. 옳으리라. 이 대목이야말로 부처님이 금강보좌에 앉으시어 太古때의 소식을 그대로 들어내시는 마당이니 어찌 장로로 하여금 우리의 귀에까지라도 쨍하게 들리도록 「드무십니다」라는 환호성이 터져 나오지 않겠는가! (51)
如如不動이여 照而常寂하고 혈혈回光이여 寂而常照로다. 번역하되 「의젓하여 안움직임이여 비추어서 항상 적적하고 오뚝하여 빛을 돌이킴이여 적적해서 항상 비춤이로다」(52)
○에다 답을 써넣어라. 初學들의 알뜰한 살림살이를 세우는 데 그 뜻이 있으니 조금도 오해를 말고 답이 나오거든 눈 밝은 이에게 인증을 받아라.
문 : 눈으로 보는 중생은 어디에 있습니까?
답 : 너의 ○○에 있느니라.
문 : 귀로 듣는 파순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답 : 너의 ○○에 있느니라.
문 : 혀로 이르는 부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답 : 너의 ○○에 있느니라.
문 : 혓바닥 속에 잇는 말씀을 한마디 던져 주십시오.
답 : 이것도 동그랑 땡 저것도 동그랑 땡 모두가 동그랑 땡이니 토끼뿔은 물속 달을 꿰었고 거북털은 배속 꿈을 털었느니라. (53)
妄心이 本空하니 塵境이 本寂한 줄을 알면 孤峯絶頂에 獨坐하여 天下人을 踏殺하리라. (53)
三界 九地의 중생은 모두가 淸淨心을 바탕으로 하는 수승한 열반妙心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때, 「내가 다 남김없이 열반에 들게 하여금 멸도하였느니라」시는 말씀이 부처님의 입밖에 떨어지기도 전에 三界 九地의 중생은 모두가 한 때에 부처를 이루는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59)
중생이 있음으로서 법이 있고 법이 있으므로서 멸도란 말귀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四相에 휘둘리면 중생이나 四相을 여의면 스스로가 부처임을 깨처 앎으로 하여금 멸도에 든다고 말씀을 던지신 것이니 실로 중생에게는 허공을 찢어내는 소식이라겠다. (60)
하늘사람과 땅 사람이 한 수레로 오고 옛 사람과 지금 사람도 한 가마로 가는구나! (60)
실로 세계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을 이른다면 허공을 지나지 못할 것이요. 성품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을 이른다면 불성을 지나지 못할 것이다. 왜냐면 무릇 있는 바의 모습은 한정이 있음으로서 크다는 이름을 못 얻지마는 허공은 한정이 없음으로서 크다는 이름을 얻으며 온갖 성품은 나름대로의 분별이 있기 때문에 크다는 이름을 얻지 못하나 불성은 한량이 없는 까닭으로서 크다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허공 중에는 본래로부터 동서남북이 없건마는 만약 알이를 두어서 四方을 본다면 곧 이 모습에 머뭄인지라 해탈을 얻지 못할 것이요, 이 불성 중에는 본래로부터 我 人 衆生 壽子가 없건마는 만약 분별을 두어서 四相을 본다면 곧 이 중생의 지견인지라 열반을 얻어내지는 못하는 것이니 이 또한 住相行爲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69)
「머무름이 없는 데 머무름」이란 마음이 경계에 닿질림으로 말미암아 옳그름의 분별과 밉고움의 판단에 새김을 두지 않음이다. 또 다시 말하여서 머무름도 치우침이요 안머무름도 치우침이니 이 두 치우침에 걸거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여읨이 곧 「머무름 이 없는 데 머무름」인 참 소식이니 이 바로가 大道라 일컬으겠다. 어즈버야 대도는 머무름이 있고 머무름이 없는 데 탐착하여서 끄달리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하여금 허공 중에 이루어진 關東八景이 방해롭지 않으니 보고 듣고 깨치고 앎이 어찌 우리 집안의 풍속이 아니겠으며, 無住 중에 나투는 妙用道理가 방해롭지 않으니 빛깔 소리 냄새 맛 닿질림이 어찌 나의 놀음터가 아니겠는가 (70)
가이없는 虛空은 곧 가이없는 佛性이요, 가이없는 불성은 곧 가이없는 허공이니라. 여기에 만약 어리석은 사람이 있어서 허공이니 불성이니 이르는 이름에만 매어달려서 둘로 나눠 놓으려고 하여봤든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끌어잡고 허공과 불성을 나누겠느냐는 말이다. 이러므로 하여서 아무 모습도 없는 이 허공이 아무 모습도 없는 이 불성과는 둘이 아니니 너는 허공이란 이름도 버리고 불성이란 이름도 버린다음 한낱 너의 法性體인 줄로 알아라. (73)
탐하는 마음의 상대는 베푸는 마음이니 그 앞 소식은 淸淨心이요, 성내는 마음의 상대는 자비의 마음이니 그 앞 소식은 청정심 이요, 어리석은 마음의 상대는 똑똑한 마음이니 그 앞 소식은 청정심인 줄로 알고 한 생각을 고쳐잡아 三學을 닦음으로 하여금 法樂을 삼고 묘한 씀이를 굴린다면 탐하는 마음에서 온 欲界와 성내는 마음에서 온 色界와 어리석은 마음에서 온 無色界는 이름뿐인 욕계 색계 무색계이면서 이름뿐인 욕계 색계 무색계인지라 되돌아 탐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은 바로 佛淨土라 이르지 않겠는가. (74)
비추어서 항상 적적한 절대성을 바탕으로 적적하면서 항상 비추는 상대성을 씀이로 하면 보임 들음 깨침 앎이라서 어찌 참다운 깨달음이 아니겠으며 빛깔 소리 냄새 맛 닿질림이라서 어찌 참다운 법이 아니리요. 이렇듯이 참다운 깨달음으로써 참다운 법을 대한즉 六根은 스스럼없이 청정功德을 이루게 마련이니 大覺보리는 애오라지 너의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75).
「무룻 있는 바의 모습은 다 허망하니 모든 모습을 아닌 모습으로 보면 곧 여래를 뵈오리라.」이르셨다. 무릇 있는 바의 모습은 허망 無實한 것이라고 잘라서 말씀하신 것은 無相理를 높이 드러내신 소식이요 모든 모습을 아닌 모습으로 보면 여래를 뵈온다고 이르신 것은 아닌 모습 곧 非相은 모습 밖에 곧 相外에 있음이 아니니 여래님의 非身相도 그 身相 밖을 향하여서 뵈올 수는 없는 것임을 뜻하심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므로 하여서 色身을 여의어도 無染淸淨한 法身을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요, 법신을 여의어도 妙用 自在한 色身은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니, 어떻게 하면 여래님의 참 몸을 얻어 뵈옵겠는가? 한마디일러라. 알겠는가? 바로 이 소식處가 山은 山 水는 水! 山水가 却來요! 男은 男 女는 女! 男女가 向去라! 일컬으는 風光이다. 이래도 모르거든 허공을 향하여 일보를 내어 디디어라. 그곳에는 黃面老子가 빙긋이 웃고 계시리라. (80)
如來님의 眞身을 뵈오려면 여래님의 그 色身 밖을 향하여 뵈오려 하지 말고 그 색신을 통하여서 아닌 색신인 법신을 뵈옵는 줄을 알았으니 우리들 중생의 眞身을 보려면 또한 우리의 이 색신 밖을 향하여 보려고 하지 말고 이 색신을 통하여서 아닌 색신인 法身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81)
十善을 닦으면 人天報를 받거니와 그렇지 않고 한강 모래數의 三毒心이 뛰쳐나와서 놀아나면 거기에 응하여서 알맞은 탈을 스스로가 뒤집어쓰는 것이니 알지어다 어리석고 게으른 놈은 소나 말 따위로 태어나고 .. (84)
사람이란 본래로 끝이 없고 한이 없는 淸淨 自性을 간직하고 있는만큼 설혹 三毒의 먹구름이 덮혔다손치더라도 그 두껍고 얇음에 따라 알면서도 모르면서도 善根은 심기어지는 모양이다. 이 선근의 깊고 얇음에 따라 그 슬기의 높고 낮음도 나투게 마련이니 , 갓난 어린아이로 부터 늙고 병들어 죽은 다음 불구덩이가 아니면 흙구덩이를 향하여서 달릴 때 까지의 한낱 가죽주머니인 자신에 대하여 어찌 제 나름대로의 無常을 느끼지 앉겠는가. 이러히 無常을 느낌에 따라 한낱 가죽주머니로서의 색신은 幻化空身임을 느낄 것이요 환화공신임을 느낄 때 비로소 이 환화공신을 끌고 다니는 놈은 바로 무엇이냐는 의심덩이가 크게 쏟아져 나올 것 이다. 쏟아져 나오는 이 의심덩이가 돈독할 때 바야흐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여 들어서 믿고 그 말씀대로 행을 닦으며 갈 것이니, 이 소식處에서 無住無相의 참된 뜻을 실다이 證得하는 것이 法의 순서라 하지 않겠는가. (90)
趙州는 이르시되 「金佛은 화로를 제도하지 못하고 木佛은 불을 제도하지 못하고 泥佛은 물을 제도하지 못하거니와 眞佛은 안 속에 앉았느니라.」하셨으니 眞佛이 어찌 無位向上人이 아니며 三佛이 어찌 隨機 三身이 아니겠는가. (91)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가 다못 道에 드는 方便이기 때문이니 일단 방편에 의하여 道에 들었다면 그 방편은 마땅히 버려야 옳은 것이다. 그러니 방편인 法도 쾌히 버리는데 어찌 항차 非法인 아닌 법을 버리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시다. 이 소식에서 온갖 것을 다 놓으면 되돌아 온갖 것은 모두 내 것이 되는 소식이니 이러히 無上道는 전하여 지고 행하여져서 道가 이 땅에 끊어지지 않고 펴여짐을 뜻하심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95)
실로 如來의 理量이 원래로 圓滿하여서 空寂하기 때문에 身相을 두었고, 如來의 性智가 원래로 廣大하여서 靈通하기 때문에 心相을 두었으나 중생들은 無明의 가리움으로 말미암아 四大六身을 自身相으로, 六塵緣慮를 自心相으로 誤認錯覺하는데서 원만한 體와 영통한 用을 자재로이 굴리지 못하고 갖추어진 공덕을 물리치면서 재앙만을 거두어 들이는 셈이니 이 자리에서 回光返照하 라. 그리하여 我와 法을 아울러 잊어버리면 비로소 常見과 斷見도 여의면서 一味가 方現하는 最上乘 도리에 높이 앉으리니, 바야흐로 여래의 공덕을 찬양하면서 같이 가리라. 이 소식처인지라.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구나. 이 법이 있음이냐? 이 법이 없음이냐? 一心이 열리면 三智로 벌어진다더라. (95)
淸淨信者들은 我相을 여읨으로써 것은 빔과 다르지 않고 빔은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느낌 새김 거님과 알이도 그 當處가 비어서 고요적적함을 알기 때문에 마음은 항상 휘영청이 밝아서 번거롭지 않으니 천하가 태평일 것이요, 人相을 여읨으로서 四大가 본래로 허망하여 실답지 않으니 마침내 흙과 물과 불과 바람으로 돌아감을 알았기 때문에 시시털털한 五慾樂따위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요, 衆生相을 여읨으로써 生滅心이 본래로부터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生死 去來에 두려움이 없을 것이요, 壽子相을 여읨으로써 나라 일컬으는 몸이 허망하여 실답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끝이 없는 허공으로 더불어서 옳고 그르고 굽고 곧음이 없으매, 뫼가 높고 물이 낮음은 나의 손발이요, 바람이 불고 구름이 감돎은 나의 나들이요,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귐은 나의 놀음인지라 따로 상대할 삼계를 다시 어디에서 찾아보겠는가 말이다. (94)
부처님의 설법은 물위에 뜬 갈대배와 같이 부딪치면 굴려서 옮기듯이 無定法을 좋이 取하며 無定法을 좋이 說하시니 만약 定說이 있을진댄 어느 것이 有가 아니며, 만약 定說이 없을진댄 어느 것이 無가 아니리요. 이미 有 無法이 없을진댄 필경엔 이 무엇인가! 法을 이르고 非法을 이름이 다 옳지 않을진댄 필경에 이 무엇인가? 이래도 얻지 못하고 저래도 얻지 못하니 확연한 大虛空이라 새가 날아간 자취도 없구나. (104)
우선 第五의 如理實見分에서 말씀하신 「무릇 있는 바 모습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모습을 아닌 모습인 줄로 보면 곧 여래를 뵈올 것이니라」도 좋고 第十의 莊嚴淨土分에서 말씀하신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러히 청정한 마음을 내어 응당 빛깔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소리와 냄새와 맛과 닿질림과 요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지니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도 좋고, 第十八의 一體同觀分에서 말씀하신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이 다 마음이 아니요, 그 이름이 마음일새니라. 무슨 까닭이냐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당장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오는 마음도 얻을 수 없음이니라.」도 좋고, 第二 十一의 非說所說分에서 말씀하신 「수보리야, 여래가 중생을 중생이라 함은 중생이 아니요, 이 이름이 중생임을 말함이로다」도 좋고, 第二十六의 法身非相分에서 말씀하신 「만약 빛깔로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지라, 여래를 뵈옵지 못하리라」도 좋고, 마지막인 第三十二의 應化非眞分에서 말씀하신 「일체 하염있는 법은 꿈 같고 꼭두각시와 같고 거품같고 그림자같고 이슬같으며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러히 여겨볼지니라」도 좋으니 아무 구절이라도 마음에 들고 문맥이 잘 소화되는 것을 가려서 그 뜻을 밝혀 낸다면 우선 無我理에 통하고, 無我理에 통하면 따라 마음에 能緣과 所緣이 끊어지고, 마음에 能緣과 所緣이 끊어지면 다음엔 胸中이 落하여 맑고 깨끗하며 허공으로 더불어서 둘이 아님을 알게 될 것 이다 (115).
청정심은 무엇인가? 부처님 말씀따나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이르심과 같이, 빛깔을 보되 여의어서 머물지 아니하고 그 마음을 낳음은 智人의 마음씀이다. 빛깔에만 머물러서 그 마음이 굴리임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움 같고, 빛깔에 머 무름 없이 그 마음을 굴림은 허공에 구름이 거침과 같음이니 마음의 달은 길이 빛을 놓을 것이다. 浮雪居士도 노래를 부르시되 「눈으로 보는 바가 없으니 판가름이 없고 귀는 들음에 소리가 없으니 옳그름이 끊어졌구나. 판가름과 옳그름을 모두 놓고 다만 마음부처를 보아서 스스로 귀의할 뿐이로다.」하셨으니 그 마음씀이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이렇듯이 道人은 눈으로 보되 그 보는 바에 휘둘리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판가름이 사라지고 귀로 듣되 그 듣는 바에 휘둘리지 않음으로 하여금 옳그름이 끊어졌으므로 되돌아서 온갖 법의 판가름과 옳그름을 잘 처리하되 붙이지 않고 머물지 않은 것이니 이 當處인지라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시는 소식이라 하겠다. (136)
佛이라면 형상과 사리를 이름이 아니고 眞理를 이름인 것이다. 圓明하고 심寂한 청정법신을 일컬음이다. (156)
이 경의 소식이야 말로 물로 능히 적시지 못하고, 불로 능히 태우지 못하나 천번 변하고 만번 변하여도 변하여서 가지 아니하여 물건마다 응하고 천변 변하고 만번 변하여도 변하여서 또한 오지 아니하여 물건마다 응하니 情識으로 이를 바 아니며, 思量으로 용납할 바 아닌 文字性까지라도 빈 금강반야바라밀다인 소식이다. (162)
모습이 모습 아니니 또한 부처도 부처가 아니요. 이러히 있음과 없음을 갖추어 세우지 않는데 이러히 天眞面目인 부처는 호올로 나투는 것이다. (165)
모든 法이 本空임을 알고 經義를 요달하여서 生死想을 쓸어내면 겁내고 두려운 생각이 사라질 것이니 참으로 드뭄이라 이르지 않겠는가. 무슨 까닭으로써이냐 본래로 父子가 同氣이니 또한 同家인지라 어찌 일찌기 놀래고 겁내고 두려움인들 따로 있겠는가 (178)
諸相이 本空하니 無生에 머물 것이요 衆生이 本寂하니 無生을 제도하여야 할 것이다. 무슨 뜻인가 모습이 곧 모습이 아니므로 낳음도 곧 낳음도 아니요 죽음도 또한 죽음이 아니니 생김도 아니고 꺼짐도 아닌 그 당처를 가르치심이다. 다시 말하자면 人我 가 不生하고 覺照가 不滅함이니 이것이 바로 不住에 머뭄이요 無生을 제도함이 아니겠는가 이 소식이 여래의 本領이요 여래의 本心이시니. .(180)
이 마음이 法性面으로는 無邊法身인 여래지마는 用相面으로는 無盡衆生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알아내기란 지극히 어려운 것이니 세상 사람은 이 마음이 앞 경계에 부딪쳐서 굴리이고 뒷 경계에 끄달려서 굴리일 때마다 변하고 또 다시 변하면서 뛰쳐 나오는 識인 알이를 그릇 인정하고 마음이라 고집을 한다. 이 알이인 妄心은 앞의 생각과 당장의 생각과 뒤의 생각이 엇갈리고 섞갈리면서 흘러가는데 생각생각이 일어나고 꺼짐이 정지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천만갈래의 차별心數를 낳아 놓는다. 이 차별心數을 가리켜 들뜬 마음이니 삿된 마음이니 망녕된 마음이니 따위로 표현하는 뭉치마음이지마는 여기에서 한 생각을 일으키되 찰라에도 생기는 새김과 꺼지는 새김을 두지 아니하고 다시 생기고 꺼짐을 없애려고도 않음을 이름하여 非心인 「아닌 마음」이라 하며 이미 생기고 꺼짐을 좋이 없앨 것도 없음일진댄 오직 묘하게 맑고 뚜렷이 밝은 마음이 항상 머물러서 꺼지지 아니함을 眞心 곧 참마음이라 이른다 이렇듯이 숱한 뭉치마음의 그 當處를 알고 한 생각을 뛰칠 때 이 바로가 곧 眞心이요 이 바로가 곧 常心이요 이 바로가 곧 佛心이요 이 바로가 곧 반야바라밀다心인 것이다. (222)
古人도 이르시되 莫言空打坐하라 勝別勞心이로다 번역하여 「퍼질러 앉음만을 말하지 말라 오히려 따로 마음을 굴림이 나으리라] 하신 것이다. 실로 有爲가 비록 거짓이라 겠지마는 버린즉은 功行을 이루지 못하고 無爲가 비록 참이라겠지마는 헤아린 즉 聖果를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니 福慧雙修가 大道의 基本임을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231)
문) 어찌하여 괴로움과 슬픔의 중생이 있습니까?
답) 괴로움은 즐거움의 상대요 슬픔은 기쁨의 상대요 중생은 부처의 상대이니, 즐거움을 따로 구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고 기쁨을 따로 찾기 때문에 슬픔이 생기고 부처를 따로 바라기 때문에 중생이 생기는 것이니, 너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놓고 슬픔과 기쁨을 버리고 중생과 부처를 여의면 비로소 참 즐거움과 참 기쁨과 참 부처를 이루리라. 왜 그러냐면 괴로움과 즐거움이 비록 둘이나 그 뿌리는 오직 하나이니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까닭이요, 슬픔과 기쁨이 비록 둘이나 그 뿌리는 오직 하나이니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까닭이요, 중생과 부처는 비록 둘이나 그 뿌리는 오직 하나이니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까닭이다. 이렇듯이 하나인 절대性의 진리를 깨치지 못하고 둘인 상대性의 幻相에만 사로잡히면 도깨비 굴에 떨어진다. (249)
이 법은 평등하다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머리가 있고 손 발이 있어서 그 맡은 바 事實을 履行한다.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학다리는 길고 오리다리는 짧아서 맡은 바 生涯를 처리한다.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녹음이 짙고 가을이면 단풍이 붉고, 겨울이면 눈이 내려서 맡은 바 時節을 整理한다.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뫼는 높으니 높은데 맡기고 물은 낮으니 낮은데 맡겨서 造化의 妙를 가져온다.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부처는 미하여 중생이 되고, 중생은 깨쳐 부처를 이루며 간다. (261)
實로 죽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보통 마음의 씀이로는 안된다. 그야말로 三世間을 꿰뚫어서 生死關을 뛰어넘는 妙機를 주무르는 데 있는 것이니, 어찌 安逸을 꾀하고 趣味를 살리고 知識 넓히는 수단과 방편만으로서 이 문제가 다뤄질까 보냐. (182)
本來 無一物은 육조대사의 물건이요 本來 無一物이라 함도 틀린 것은 懷讓禪士의 물건이요 본래 무일물이라고 함도 틀린 것이 아님은 나의 물건이다. (184)
이 경전의 공덕은 性中의 煩惱가 쉬고 心中의 我所가 끊어진 無爲法이기에 그만 그대로가 虛徹靈通한 佛心인지라 三世間을 꿰뚫 어서 生死를 오로지 여의는 소식이므로 그 理는 뚜렷하고 그 事는 평탄하고 그 道는 지극하니 非相으로서 實相을 삼고 非般若로 서 實般若를 삼는 불가사의 不可稱量의 가없는 功德性과는 비유가 아니되기 때문이다. 이 功德性인지라 혓머리가 떨어졌으니 좋이 들내지 못하며, 마음뿌리가 끊겼으니 좋이 일컬으지 못하며, 있고 없음이 망하였으니 좋이 재지 못하며, 착하고 악함이 쉬었 으니 좋이 나투지 못하는 當處로서 內外가 비어서 時空이 없으니 魔法과 佛法이 자취를 감추었고 上下가 비어서 中間이 없으니 正道와 邪道가 판가름을 여읜 消息處가 아닐까 보냐. 이 消息處인지라 바로 한 주먹으로 幻化城을 무찌르고 한 다리로 玄妙關을 뒤집으니, 어즈버야! 乾坤이 失色이요 日月이 無光이로다. (189)
부처님께서는 無我法에 통달하여야 참 보살이라 이르신 것이니 이럴진댄 되돌아서 참 보살님을 어디서 만나 뵙겠는가 실로 얻는 바의 마음이 있으면 三界를 다 뒤져도 못 만나 뵙는다. 그러나 얻는 바의 마음이 없으면 뜰 앞에 핀 꽃잎에서도 만나 뵙고 시냇가에 흐르는 물소리에서도 만나 뵙고 뿐이랴 글귀와 말마디에서도 만나 뵈옵느니라 알겠는가 이 소식인지라 허공이 내려앉으니 속히 거두어 들여라. (212)
「머뭄없이 머뭄」을 행하면 하늘눈 슬기눈 법눈은 물론이요 부처눈까지 얻는다. 그러나 찾으려면 天下를 휘돌아도 안된다. 왜 그런가? 찾는 그놈이 그놈이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부처님은 그 다섯눈의 당처를 밝히시기 위하여 恒河沙數의 恒河沙數인 세계를 비유하심은 중생이 다 恒河沙數의 그 恒河沙數인 뭉치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뭉치마음은 다섯눈을 조종하는 主宰者이다. 이 뭉치마음이 能所緣에 휘둘려서 천만갈래로 굴리이나 그 當處는 하나이다. 하나인 마음은 萬人이 같으므로 如來心이라서 더하고 衆生心이라서 덜함이 없는 하나로서 춤도 추고 싸움도 한다. 惡種을 심어서 지옥도 꾸미고 善種을 심어서 천당도 세운다. 이 마음은 가없는 허공으로 더불어 비롯이 없고 마침도 없이 휘영청이 밝으나, 들뜨기 시작하면 한이 없는 뭉치마음으로 변하면서 굴리는 경계에 따라 강물이 흘러내리듯이 일초의 끊임도 없이 그대로 계속하여 쏟아진다. 만약에 이 뭉치마음이 쉴 때가 있다면 이것은 까무러칠 때와 잠을 잘 순간일 것이라 하여두기로 하자. (221)
生死業을 녹여 냄과 아울러 나의 몸을 三界에 우뚝이 나투는 데는 슬기로운 수단과 방편이 절대로 따르기 마련이니 고인도 이르시기를 「다만 作福할 줄만 알고 性空함을 해득하지 못함은 새의 한쪽 날개가 부러짐이요, 다만 性空함을 볼 줄만을 알고 作福할 줄을 해득하지 못함은 수레의 한쪽 바퀴가 떨어짐과 같느니라.」하셨으니, 이는 大道로 더불어서 서로 계합이 안됨을 뜻함인 것 이다. 그러나 그 둘을 비교할 때 觀空者는 作福者의 따를 바가 못될 만큼 수승하지마는 금상첨화를 이루려면 作福도 따르게 마련 이니, 이러므로 고인도 이르되 「莫言空打坐하라. 猶勝別勞心이로다」번역하여 「퍼질러 앉음만을 말하지 말라. 오히려 따로 마음을 굴림이 나으리라」하신 것이다. 실로 有爲가 비록 거짓이라 하겠지마는 버린즉은 功行을 이루지 못하고, 無爲가 비록 참이라겠지마는 헤아린즉 聖果를 얻어내지 못하는 것이니, 福慧雙修가 大道의 基本임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231)
最上乘 道理인 이 經을 통하여서 결사적인 정진에 뛰어드는 것만이 무량공덕을 쟁취하는 수단이요 방편으로서 어찌 삼천대천 세계의 칠보보시의 복덕行이 이를 따르겠는가 말이다. 어즈버야 心地一片月은 照破三千界로다 번역하여 「마음자리의 한 조각달은 삼천계를 비추어 뚫었도다」어찌 슬기밖의 일에 마음을 던질까보냐 (273)
만약 여기에 미련한 고집장이가 있어서 비록 진실로 내가 있음을 주장할지라도 그 성품은 當處가 비어서 모습이 없으므로 하여금 어디에서 무엇을 끌어 잡고 내가 있음을 내세우며, 만약 法身으로부터 이루어진 나의 色身이 있다면 이 색신은 흰핏톨과 붉은 핏톨로 뭉쳐진 세포의 가죽주머니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이나 이 흰핏톨과 붉은핏톨 따위는 줄곧 죽고 생김의 연속으로 일정한 모습이라고는 없는데 그 무엇을 기준하여서 내라고 자신있는 장담을 하겠는가. 까닭에 뒤바뀐 생각을 가진 凡夫로서 비록 내가 있음을 우겨댄다손 치더라도 이 범부相도 또한 적멸인 것이요 범부상이 적멸이기 때문에 범부는 범부가 아니고 이 이름이 범부일 따름인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므로 古人도 이르시기를 前念 不覺을 이름하여 범부라 이르고 後念 卽刻을 이름하여 범부가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278)
문: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을 가리키심이니까
답: 뱀이 대통에 들어서 가는 소식이로다
문: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물었는데 어찌하여 뱀이 대통에 들어서 가는 소식이라 하십니까
답: 너는 어찌 한 빛깔이 그 한 빛깔 가운데 있지 아니하고 한 구절이 그 한 구절밖에 있음을 모르느냐.
문: 어리둥절 합니다.
답: 무엇이 어리둥절 하느냐. 方位가 없으므로 하여금 능히 方位를 두고, 去來가 없으므로 하여금 능히 去來를 두는 것이니, 「본래로 검지도 희지도 않으나 곳에 따라 푸르고 누름을 나투네」이르는 의취이기도 하다.
문: 더욱 답답할 뿐입니다.
답: 너는 오로지 어리둥절하고 답답한 것만을 끌어 잡고 뒹구는구나. 단단히 들어라.
石男이 밑빠진 바리의 밥을 먹으니 「도솔을 여의지 않으시고 이미 왕궁에 오셨으며,
木女가 줄없는 거문고를 뜯으니 「어머니의 태를 나오시지 않으시고 이미 중생을 건져
마치시다」이르신 소식이기도 하니 알몸으로 달려들어서 이 문제를 처리하라. (279)
古人도 이르시기를 봄·들음·깨침·앎에 속하지도 않고 또한 봄·들음·깨침·앎을 여의지도 않는 것이라니, 봄·들음·깨침· 앎에 나아가서 구하여도 틀리며 봄·들음·깨침·앎을 떠나서 구하여도 또한 틀릴진대 어떻게 함으로써 여래님을 몸소 뵈옵겠는가? 별다른 소식이 따로 없다. 다만 소리와 빛깔에 쏠려서 새기지 말고 그만 그대로 쓰면 그만인걸! 다만 봄·들음·깨침·앎 이 참이 아니어늘, 그 봄·들음·깨침·앎에 쏠려서 얽히지 아니하고 그만 그대로 쓰면 그만인걸! 알겠는가? 이 곳인지라 한 발자국이 틀리면 그대로 邪道에 떨어지는 갈림길이니 입을 봉하자. 불씨가 하늘 밖으로 튀니 눈은 별가으로 가는구나. 에익! 이래도 모르겠거든 봉래산 꼭대기의 탕건바위에게 물어보아라. (288)
去來가 本寂하고 動靜이 一如하기 때문에 山河와 木石과 禽獸 따위의 모든 모습이나 善惡과 正邪와 憎愛 따위의 온갖 법이 應然 함으로 말미암아서 남자는 남자이면서 여자와 통하고 여자는 여자이면서 남자와 통하고, 부처는 부처이면서 중생과 통하고 중생은 중생이면서 부처와 통하고, 늙음은 늙음이면서 젊음과 통하고 젊음은 젊음이면서 늙음과 통하니 性別間에 迷悟間에 老小間에 안통함이 없고, 큼은 큼이면서 작음과 통하고 작음은 작음이면서 큼과 통하고, 넓음은 넓음이면서 좁음과 통하고 좁음은 좁음이면서 넓음과 통하고, 김은 김이면서 짧음과 통하고 짧음은 짧음이면서 김과 통하니 大小間에 廣狹間에 長短間에 통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럴진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에 가름이 생기지 않을 것이요 입을 열고 혀를 굴림에 새김을 달지 않을 것이니 이 바로가 밝은 거울에 물건이 비치고 빈 골에 소리가 응함같아서 비치고 응함도 스스럼없이 확연하지 않겠는가 (306)
여래의 法性身은 모습이 아니나 모습이 아님도 아니므로 性相이 如如하여 動靜이 不二인 當處이니 이른바 여래는 옴이 아니나 오지 아니함이 아니고, 감이 아니나 가지 아니함이 아니고 앉음이 아니나 앉지 아니함이 아니고 누움이 아니나 눕지 아니함이 아니므로써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는 四威儀中에 항상 空寂性을 여의지 않으심을 여래라 이르겠다. 천변 변하고 만번 변하나 변하여 가지 않으니 이 바로 밑빠진 바리의 밥을 먹는 소식이요, 천변 변하고 만번 변하나 변하여 오지 않으니 이 바로 줄없는 거문고의 소리를 듣는 소식이다. 이렇듯이 청정하고 이렇듯이 담적하면서 妙用이 自在하나 그 실다움을 글로 좋이 쓰지 못하고 말로 능히 이르지 못하고 물감으로 감히 그리지 못하고 흙으로 몸소 만들지 못하니 이른바 말길이 끊어졌고 마음길이 꺼진 그 자리인지라 애오라지 청정법신이신 비로자나佛의 얼굴에 봄바람이 가득한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13)
지옥이 妄心이면 천당도 妄心이네.
뱀이 대통에 들어서 갈 때 남은 한라산이요 북은 백두산일러라. (330)
「온갖 하염있는 법이 꿈과 꼭두와 거품과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는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러히 관할지어다」부처님은 이러히 게를 읊으셨다. 옳기는 옳은 말씀이나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法界體를 모습에서 취하지도 못하면서 「의젓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이르실까. 온갖 有爲化演法이 法界를 여의면 자체相없음이 앞 노래의 비유와 같이 究竟位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 당처인 절대성자리가 의젓하기 때문에 「응당 이러히 관할지어다」일컬으심이니 千萬古의 眞理를 들내심이라 하겠다. 이렇듯이 모습에서 취하지 아니함이란 三相에서 취하지 않음을 뜻함인데 眞如自性은 非有相이며 非無相이며 非非有相이며 非非無相이기 때문 에 常見을 부수시기 위하시어 一切의 空을 말씀하셨고 斷見을 부수시기 위하시어 一切의 有를 말씀하셨고 二邊에 떨어짐을 두려 워하시어 不空 不有를 말씀하신 것이니 이 다 緣을 대한 꾸밈새로 알지언정 言句나 字句 自體가 究竟은 아님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러므로 말미암아서 一切法이 다 緣으로 좇아 일어남으로 하여금 有爲法에 속한다 이르겠지만 그러나 그 당처가 비어서 모두 그 자체없음이 꿈은 셈으로 인하여 꾸나 그 자체가 없고 꼭뚜는 착각으로 인하여 생기나 그 자체가 없고 거품을 물로 인하여 일어나나 그 자체가 없고 그림자는 형체로 인하여 나투나 그 자체가 없음같이 위로는 부처님네로부터 아래로는 땅강아지나 개미에 이르기까지 凡聖의 因果等法이 실답지 않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자체는 실답지 않다 할지라도 法法이 서로가 모르면 서도 서로가 엉클리어져서 또다시 다른 法으로 줄곧 변하면서 가기 때문에 凡聖의 因果法은 어둡지 않다고 이르는 것이니 인생살이란 한낮 요지경 속이라 하겠다. (344)
본래하나 없는곳에 山河大地 나퉜구나
山河大地 부수어서 뭉쳐내니 한덩인걸
난데없는 파랑새가 납죽주어 먹더구나 (351)
人生문제를 다루는 學人들은 이 다섯갈래 중에 어느 쪽을 택함으로써 父母未生前의 면목을 접하겠는가 이 당처의 소식을 모르고 는 臨終때에 사람들이 울부짖어 봤던 이 몸을 代行은 못할 것이며 죽은 뒤에 곳곳마다 비석을 세워 봤던들 冥途의 방향을 틀어 놓지는 못할 것이다. 古人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올바른 修行만 가지면 大根은 三日안에 中根은 三個月안에 下根은 三年안에 見性成道를 할 뿐 아니라 그 功德으로 九族이 하늘에 나느니라! 만약 이것이 거짓이면 내가 대신 지옥에 가겠다」하셨다니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인생 문제의 해결은 제각기의 수행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니 人身을 받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不生不滅의 바다로 키를 돌려라.
(금강경 강송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