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 즐겁다고 알고 괴롭다고 아는 그것이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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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문사 작성일2016.11.10 조회6,288회 댓글0건본문
2) 법문(法門); 즐겁다고 알고 괴롭다고 아는 그것이 깨달음이다.
우주 삼라만상이 오직 한마음에 의지한다는 사실을 철저히 사무쳐서, 마음 밖에는 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연해져야 비로소 참된 수행의 첫걸음을 뗐다고 할 수 있소. 모든 법이 다만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모든 것이 그림자와 메아리와 같은 것이니, 그 무엇도 이게 이것이라고, 저게 저것이라고 가리킬 수조차 없는 거요. 따라서 어리석은 분별지(分別智)를 멋대로 휘둘러, 있지도 않은 것으로부터 모습을 취하고 이름을 붙여 실체화되고 고정화된 온갖 법들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걸 밝히는 것이 정지(正智), 곧 바른 지혜요.
흔히 세속에서와 같이 많이 배우고 많이 익혀서 새로운 지식을 쌓아 가는 것을 공부인 줄로 알고있는 경우가 많으나, 그것은 전혀 거꾸로 가는 거요. 아는 것, 가진 것을 전부 토해내고 또 토해내야 그 '참 성품'이 드러날 텐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오히려 꾸역꾸역 '내 것'을 불쿠고 늘리는 데에만 몰두하는 거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공부란 앞서 말한 분별지가 참된 지혜 광명을 얻음으로써 온갖 법이 하나의 모습으로 원융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소. 이것은 마치 꿈꾸던 사람이 꿈을 깨는 것과 마찬가지요. 많이 배우고 익혀서 꿈을 깨는 것이 아니지 않소? 꿈을 깨는 데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치 않은 거요.
일체만법 하나하나가 자체의 성품이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소? 전부다 '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거요. '참 성품'이 드러난다 소리가 그 소리요. 온갖 법이 오직 마음 뿐이요, 중생의 마음에 의지하지 않고는 어떠한 한 법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쳐야 하오. 그래서 마침내 일체가 '한 마음'으로 되돌려진다면, 지금 눈앞의 온갖 차별법과 울퉁불퉁한 천태만상의 모습이 그 모습 그대로 전혀 아무 일 없는 거요. 마음만으로만 그런 거라 소리요. 눈앞에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아무 일 없는 거요. 일체만법이 이글거리는 용광로의 눈 한 송이인 거요.
이런 소리를 들으면 대개 마음이 뭐냐고 묻고 싶을 거요. 그러나 그 질문엔 누구도 답할 수 없소. 마음이 마음에 대해 마음에게 얘기하는 형국이니 그건 본래 불가능한 일 아니겠소? 그건 마치 눈으로 눈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요. 일단 마음이 굴러야 마음에 대해서건 뭐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거요. 그러니까 이 마음은 찾으면 아무 데도 없지만, 찾는 행위 그 자체가 벌써 마음이 작용을 하고 있는 거요. 이렇다고 저렇다고 아는 모든 것, 그게 전부다 마음 그 자체이니, 마음을 다시 찾고 말고 할 것이 없는 거요. 마음이 지금 온전히 제자리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거라 소리요.
누구나 괴롭다고 알고, 즐겁다고 알고, 또 기쁘다고 알고, 슬프다고 알고, 모든 걸 다 알지요? 그런데 중생이 헷갈려서 그 모든 걸 아는 주체가 의심할 여지없이 '나'라고 여기면서 온갖 사단이 벌어지는 거요. 참으로 아기자기한 천태만상의 그 모든 감정들, 그런 모든 알음알이가 사실은 오는 데가 없소. 그림자같이 있는 이것과 그림자같이 있는 저것 사이에서 말아내는 게 감정이니, 그건 본래 근거가 없는 거요. 이 그림자와 저 그림자 사이에서 말아내 봤자 또 다른 그림자 아니겠소? 오는 데가 없으니 그 감정이 전부 까닭 없는 거라 소리요.
오는 곳이 없는데도 인연만 닿으면 모든 걸 나투어내는 그것이 바로 신령한 깨달음, 즉 영각(靈覺)이오. 오는 곳에 대한 의문도 역시 영각(靈覺)의 활동이오. 그러니 영각 자체는 알고 모르는 것과 상관없소. 옳고 그른 것과도 상관없고, 밝고 어두운 것하고도 상관없소. 인간의 어떤 알음알이하고도 상관없는 거요. 상관없는 게 아니라, 그 알음알이 자체의 근본이고 바탕이오.
그래서 이 영각을 일체의 신령스런 앎의 바탕이라 하여 영대(靈臺)라고도 말하고, 혹은 우리말로 깨달음이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예" 하고 말하는 게 바로 깨달음이요, "아니요" 하는 게 깨달음인 거요. 뭔가 괴로워하는 게 깨달음이고, 알고 싶어하는 게 바로 깨달음이오.
이렇게 일거수일투족 인간 삶의 어떤 부분도 이 영대 아닌 게 없소. 이러한 앎의 본체, 모든 깨달음의 바탕을 바로 '부처'라 그러는 거요. 자, 그러니 누가 부처 아닌 사람이 있겠소? 전부 부처요, 전부 불사(佛事)인 거요. 잘난 부처 못난 부처, 있는 부처 없는 부처, 아는 부처 모르는 부처.· · · 이치가 이렇다는 건 웬만큼 알지만, 만약 의심할 여지없이 진실이 그렇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깊이 한 번 참구해 보시오.
행위의 주체가 없는 거요. 수용의 주체도 없소. 오직 몽땅 깨달음뿐이오. 이것을 일러 법계(法界)니 법신(法身)이니, 혹은 진여(眞如)니 진리니 하여 이름이야 수 없이 많지만, 이런 말들은 전부다 본래 이름이 없는 것을 말로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빌려 쓴 것뿐이오. 이 깨달음은 본래 모든 이름, 모든 모습, 모든 의미, 모든 가치체계나 논리 체계를 여의고 있는 거요.
그런데 이 깨달음이라는 말이 우리한테 지금 전혀 잘못 받아들여져서, 깨닫는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내'가 얻어야 할,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궁극적으로 얻어야 할 그 무엇으로 알고 있는 거요. 그게 아니오. '네가 바로, 있는 그대로 부처니라' 하고 얘기해도 도무지 믿질 않소. 이 일체의 신령스런 앎의 바탕, 또 다른 말로 이 '한 마음' 이외에 다른 깨달음이 있는 게 아니오. 이 '한 마음'을 드러내면 그게 곧 깨달음이고, 깨달음이 곧 부처고, 부처가 곧 법이요 마음이니, 그러한 모든 말들이 전부 같은 것을 다르게 부르는 것뿐이오.
이처럼 모든 법이 깨달음의 성품이 인연 따라 환(幻)처럼 꿈처럼 나툰 것이니, 행위나 작용의 주체가 있을 수 없소. 그러나 인간은 어떻소? 행위의 주체를 세우지 않으면 말이 이루어지질 않소.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다. '내'가 봤다. '내'가 했다.· · · 이런 식으로 말을 하려면 주어(主語)를 세워야만 해요. 그러나 이 주어를 세우는 버릇에서 빨리 벗어나야만 직관이 가능한 거요. 바로 볼 수가 있다 소리요.
흔히 세속에서 깨달음은 지각(知覺)한다는 뜻으로 쓰여요. 그런데 인간의 지각과 행동 사이에는 갭이 있소. 벌어짐이 있다고. 지각이 바로 행동으로 옮겨지질 않아요. 왜냐? 있지도 않은 '나'란 놈이 끼어들기 때문이오. 행위의 주체가 끼어든다 소리요. 뭔가 지각하게 되면, "이렇게 하는 게 이로울까? 저렇게 하는 게 이로울까? 혹시 이러다가 뭐 또 곤두박질치는 거 아닐까?" 요리 재고 조리 재고, 망설이고 허둥거리고 후회하고 하는 일이 생겨요. 그러나 이 '나'라고 하는 놈은 본래 없는 거요. 사실은 있는 건데, 없는 거로 하는 편이 살아가는데 유리해서 그런 게 아니고, 본래 없는 거요.
인간은 무슨 일을 당했을 때, 그 일에 대한 '이해'를 먼저하고, 그 이해를 발판 삼아 '행동'을 해요. 특히 세상에서 지혜롭고 사려 깊고 총명하다는 평을 듣는 사람일수록, 우선 그 일에 대한 지각을 한 다음, 잘 분석하고 재조립해서 나름대로 가장 근사한 규범을 만들어요. 그 다음, 지각이 바로 행동하는 게 아니고, 이 규범이라는 필터를 거쳐서 행동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이건 행동이 아니고 행위(行爲)가 되는 거요.
왜 규범을 만들까요? 훌륭한 '나'가 되기 위해서요. '내'가 이로워야 되고, '내'가 안정돼야 되고. 이 개체를 이롭게 하고 이 개체를 유지하고 지속시키고 향상 발전시키는데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규범을 만드는 거요. 우리가 소위 이해한다는 게 이런 거요. 본래 무한한 이 깨달음이 자체의 작용으로 살지 못하고, '나'라는 엉뚱한 놈이 끼어들어서 쪽박 만드는 거요. 이 깨달음은 우주적인 에너지 그 자체요. 거기에 개별적인 것은 없소. 지금 "예" 하는 게 우주가 대답하는 거요. '내'가 괴로워하는 게 우주가 괴로워하는 거요. '내'가 슬퍼하는 게 우주가 슬퍼하는 것이고, 기뻐하는 게 우주가 기뻐하는 거요.
전부 어떤 우주적인 에너지의 활동일 뿐인데, 그게 모두 '내'가 그런다고 여기는 거요. 공부도 '내'가 하고, 수행도 '내'가 하고. 그러니 수행의 주체가 '나'인 줄로 알고 있는 동안은, 천년 만년 가도 헛수고하는 거요. 전혀 출발부터 잘못됐기 때문이오. 수용(受容)의 주체도 마찬가지요. 수용이 뭐요? 뭔가 받아들이는 거요. '내'가 고(苦)를 받고, 재난을 당하고, 슬픈 일을 당하는, 그렇게 '내'가 겪는 게 수용이오. 그런데 '나'란 놈은 본래 없는 것이니, 욕을 먹고 무시를 당하고 설움을 받아도 도무지 받은 놈이 없는 게 진실인 거요.
주는 놈도 엄연히 있고, 받는 놈도 실제로 있는 것 같지만 그게 전부 생각만으로 그런 것이니, 천 갈래 만 갈래 전부 따로따로 인 것 같은 온갖 법이 몽땅 다 깨달음뿐인 거요. '나'도 깨달음이고, 욕지거리도 깨달음이고, 칭찬도 깨달음이고. 어느 것도 그것 아닌 게 없소. 그래서 이 행위의 주체, 수용의 주체가 없다는 사실, 즉 제일의공(第一義空)을 깨달으면, 그게 바로 해탈이오. 더 이상 서발장대 거칠 게 없는 거요. 수행하기는 수행하는데 수행하는 자를 찾을 수가 없으니, 그때 비로소 그것을 참된 수행이라 할 수 있는 거요.
'나'라는 주체가 하는 동안은, 뭔가 공덕을 바라게 돼 있소. '어떤 게 이로울까?' '어떤 게 더 편할까?' 등등, 항상 뭔가 더 많고 편하고 향상되길 바래요. 이 깨달음은 바로 허공성 그 자체요. 허공이 어떻게 향상발전할 수 있겠소? 혹은 향하퇴화(向下退化)하겠소? 일체가 몽땅 허공성인데.
이 깨달음은 본래 한 걸음도 나아갈 바도 없고, 한 걸음도 물러날 바도 없소. 허공이 나가면 어디로 나가고, 물러나면 어디로 물러나겠소? 그게 전부 느낌이오. 느낌만으로 나가는 것 같고, 느낌만으로 물러서는 것 같은 거요. 느낌만으로 괴로운 것 같고, 느낌만으로 즐거운 것 같지만, 이 본래의 신령스러운 깨달음 자체는 전혀 늘고 줆이 없이 늘 그대로요. 그러니 허구한날 마땅치 않은 이것을 마땅한 저것으로 바꾸려고 노심초사하지 말고, 마땅한 것이나 마땅치 않은 것이나 그게 전부 한 바탕 위에 찍힌 그림자 같고 허깨비 같은 것임을 얼른 알아차려야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