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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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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문사 작성일2016.02.25 조회4,762회 댓글0건

본문

유마경 <문수사리문질품>에 대한 사색

 

차례

1) 수행의 원류

2) 대승(大乘)수행자의 고민

3) 권위와 은둔

4) 최후의 깨달음 - 공성의 발견

5) 유마거사의 법문

6) 사족(蛇足)

 

 

 1) 수행의 원류

부처님 당시 제자들이 닦은 수행법은 매우 구체적인 것이 특징이다. 수행을 하면 수행자가 마음속에 일어난 고통을 직접 치유하는 효과가 있었다. 경전 우다나를 보면, 당시 제자들이 닦았던 수행법은 주로 관법수행이었다.

 

메기야여, 수행승은 네 가지 원리를 닦아야 한다.

1) 탐욕의 제거를 위해서 부정(不淨)을 닦아야 한다.

2) 분노의 제거를 위해서 자애를 닦아야 한다. 

3) 사유의 제거를 위해서 호흡에 대한 새김을 닦아야 한다. 

4) ‘내가 있다’는 자만의 제거를 위해서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아야 한다. 

   메기야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이루면, 무아에 대한 지각이 이루어지고,     

   무아에 대한 지각을 이루면, ‘내가 있다’는 자만은 제거되고 현세에서 열반을 이룬다.”

(우다나 제4 메기야의 품)

 

이와 같이 수행자들은 관법수행을 통해 탐욕 미움 산란 증오 해태 우울 슬픔 고통 번뇌 등에서 벗어났다. 이러한 수행의 기초에는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의 진리가 자리 잡고 있다. 연기법은 모든 법은 인연 따라 일어나며 인연 따라 사라진다는 진리이다. 그 의미는 매우 심오하다. 연기법에 따라 수행자는 다음과 같이 사고한다.

 

‘모든 고통은 인연(조건)을 따라 일어난다. 인연이 사라지면 그 고통도 사라진다.

인연조건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적절한 방편이 필요하다.

따라서 부처님이 가르치신 방편을 따라 수행하면 그 조건이 사라져 이윽고 고통도 사라진다.’

 

여기서 부처님이 전하는 방편은 오근과 팔정도 등 37가지 조도품을 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사념처, 사선정, 오근 팔정도 그리고 위에서 말한 관법수행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수행을 명확하게 정리한 것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 四聖諦)이다.

즉, 고(苦)는 인연이 모여 일어난다(集). 집착이 사라진 것이 멸(滅; 열반)이다. 열반에 이르는 수행방편은 곧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이다.  

 

연기법은 좀 더 그 본질을 말한다면, 인연을 따라 일어나는 고통은 조건을 멸하면 사라진다는 인식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생법(生法 또는 집법集法이라고도 한다)은 곧 멸법(滅法)’이라는 말로 설명하였다. 초기경전 <마하박가>에 보면 부처님의 초기 제자들은 모두 이 진리를 깨달아 아라한이 되었다.

 

세존께서는 콘당냐 외 나머지 비구(초전법륜의 5비구)들에게도 교법을 설하셨다. 그때 밥파 장로와 밧디야 장로가 먼지와 때를 멀리 여읜 법안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은 것이다. (중략)

(<마하박가> 제1편 1장 깨달음, 7. 법륜을 굴리시다.)

세존께서는 야사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고 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번뇌에서 벗어나 청정하고 가르침을 따르고자 한다는 것을 아셨다. 그리하여 본래 진실한 고집멸도(苦集滅道)의 가르침을 설하셨다. 마치 때 없는 흰 천이 잘 염색되듯이, 야사는 그 자리에서 먼지와 때를 멀리 여읜 법안(法眼)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았던 것이다. (<마하박가> 제1편 2장 전도, <최봉수역>)

 

 

2) 대승(大乘)수행자의 고민

우리는 대승경전 유마경의 관점을 받아들여 이 문제를 살핀다. 유마경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승불자의 현실인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승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선택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우리의 선택은 대승불교의 역사적인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사료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먼저 대승불교의 문제의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대승불자 유마거사의 고민을 이해할 때 유마경 문수사리문질품의 법문을 이해할 수 있다.

 

수행자는 수행을 통해 탐욕과 미움, 어리석음에서 벗어난다. 미움이 일어날 때는 자비관을 하며, 마음이 어지러우면 좌선과 호흡관, 또는 수식관을 통해 마음을 가라앉힌다. 이러한 수행전통이 오랜 세월(3, 400백년)이 흘렀을 때, 어떤 폐단이 일어났는가?

유마경에 나타난 법문을 고려할 때, 당시 다음과 같은 수행의 병통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고요함과 행복을 얻는다. 수행의 목적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현실 수행자는 수행을 통해 얻는 고요와 행복에 집착하여, 혼돈과 불행을 겪는 중생과 자신을 구분하고 있다.

보살품에 나오는 지세보살이 이 상황을 상징하고 있다. 지세보살은 계를 지키는 수행자이다. 제석천으로 위장한 마왕(魔王)이 여자들을 보내 지세보살에게 시종으로 쓰라고 하자 제세보살은 여자를 멀리해야하는 계에 어긋난다고 거절한다. 이때 유마거사는 지세보살에게 '계에 집착하면, 이 여자들은 누가 제도하느냐'고 묻는다. 지세보살의 계는 자기의 정체성을 지키는 방어수단이다. 그러나 계를 통해 지키고자 하는 자아의 본질은 무엇인가? 유마거사는 이 자아의 본질을 묻고 있다.

 

계는 수행의 행복과 고요함을 주는 방편이다. 그러나 유마거사는 고요함과 행복에 집착하는 자아(自我)의 존재의 헛됨을 깨달을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 대승불자들의 현실에 대한 고유한 통찰이 있다. 행복과 고요함을 얻은 수행자가 자신을 지키려고 할 때 일어나는 병통을 우리는 유마경 제자품과 보살품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유마거사가 부처님의 십대제자와 보살들을 경책하는 법문은 기존승단에 대한 대승불교의 현실발언에 다름 아니다. 수행자의 병통은 오늘 우리 불교현실에서도 여전히 발견할 수 있다. 빠르게 선정에 들거나 오래 동안 선정에 몰입하는 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유마경의 법문이 시대를 뛰어넘는 메시지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3) 권위와 은둔

고요와 행복을 누리는 수행자에게 대승불교는 무엇을 주장하는가?

수행자의 병통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향해 나아가라고 주장하는가?

문수사리문질품에서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대승불자들의 답변을 볼 수 있다.

 
 고요와 행복에 집착하면 무엇보다 수행성과에 집착하게 된다. 수행의 성과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결국 은둔의 길을 걷게 된다. 또한  자신의 수행성과에 대한 가치부여는 권위의식을 낳는다. 권위의식은 결국 널리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행을 등지게 된다. 이러한 수행승단의 현실은 평생 중생들을 위해 법문을 베풀며 입적할 때까지 평생을 유행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과 거리가 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승불교는 중생에 대한 자비를 찾아 볼 수 없는 당대 수행자의 수행의식을 문제 삼고 있다. 유마경은 권위와 은둔을 초래하는 수행의식이 오만과 교만에 다름 아님을 경책하고 있다. 유마경 제자품에서 유마거사는 좌선을 하고 있는 사리불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덕 사리불이시여, 그대가 쫓고 있는 것은 단지 그 방법일 뿐 좌선은 결코 수행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원래 몸도 마음도 삼계(三界) 가운데 그 모습이 내비치지 않도록 해야 참다운 좌선인 것입니다.”

 

수행의 성과에 집착하지 않고 부처님의 진리에 다가가도록 수행의식의 미망을 깨우치는 방편은 무엇인가?

수행승과 보살들의 병을 일깨우며 재가불자 유마거사를 내세우는 유마경 편집자들은 과연 누구이며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들인지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4) 최후의 깨달음 - 공성의 발견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통을 치료하는 약과 같다. 치료가 이루어 졌으면 더 이상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 치료가 다 되어 행복함을 얻었다고 하여 계속 약을 먹는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그는 이제 약을 떨치고 일어나 모든 고통이 인연조건에 의해 일어났으며, 적절한 방편에 의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사실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즉, 모든 법은 인연에 의해 일어나며 인연에 의해 사라진다는 연기법의 의미에 눈을 다시 돌려야 한다. 유마경에서 수없이 강조하지만, 이러한 자세는 수행의 성과에서 과감히 떨치고 일어날 때 가능하다.

 
 현실의 고통은 고통이 조건에 의해 일어났으며, 치료는 약에 대한 탐구가 있어야 가능하다. 치료가 가능한 것은 모든 현상이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조건에 의해 멸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생(生法)은 곧 멸법(滅法)이라는 진리이며, 이러한 법의 본질은 곧 만법의 본성이 공(空)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공사상은 대승불교에서 새롭게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법문과 더불어 일체 법을 공(空)으로 보라고 법문을 하였다.

특히 대승불교는 만법의 본질을 공으로 파악할 것을 주장하고,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핵심이자 당대 수행자의 병통을 치료할 방편이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유마거사는 기존 불교교단의 수행자에게 공(空)의 진리를 관하여, 수행의 성과에 집착하고 있는 집착과 미망의 자아(自我)를 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수행법은 곧 방편임을 강조하여 열반마저 버리는 것이 진정한 열반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실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공사상을 심오하게 전개한 대승불교의 진면목이 있다고 할 것이다.

 

문수가 물었다.

“병에 걸린 보살은 과연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하겠습니까?”

유마가 답했다.

“문수보살이시여, 병에 걸린 보살은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사실 병이란 과거 이래 실재와는 거리가 먼 뒤바뀐 업의 작용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헛된 분별로 인한 번뇌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진리에 비추어보면 그러한 병에 의해 고통 받는 존재가 실제로 있는지 도대체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몸은 4대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거기에는 정작 아무런 주재자도 창조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진리에 비추어보면 이 몸은 무아이므로 집착에 의한 헛된 나 이외에 병에 걸릴 만한 요소는 도대체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마경 문수사리문질품)

 

 

 5) 유마거사의 법문

유마거사는 공성(空性)을 바탕으로 자비심과 수행을 강조한다. 공성을 바탕으로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은 오직 중생에 대한 연민이다. 유마거사는 문수보살의 물음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이 세상에 어리석음이 남아 있는 한 그리고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제 아픔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모든 중생들에게 아픔이 남아 있는 한 제 아픔 역시 앞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혹시 모든 사람들이 병고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때 비로소 제 병도 씻은 듯이 낫겠지요. 문수보살이시여, 보살이 기꺼이 윤회 가운데 뛰어든 것은 오직 중생을 위해서이며 제가 아픈 것도 사실은 저 윤회가 원인입니다. 문수보살이시여, 제가 아픈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지요? 보살의 아픔은 바로 대자비가 그 원인입니다.” (유마경 문수사리문질품)

 

공을 이해한 보살은 어떻게 수행하는가? 유마거사의 질문에 문수보살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유마거사가 물었다.

“문수보살이이시여, 그렇다면 보살이 보살을 문병할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문수가 답했다.

“이 몸의 무상함을 들어 문병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몸을 혐오하고 세속을 멀리하라는 투의 말로 위로를 해서는 곤란합니다. 이 몸의 고통을 들어 문병해야 합니다. 하지만 열반만이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투의 말로 위로를 해서는 곤란합니다. 이 몸에 내[我]가 없다는 점을 들어 문병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근기를 성숙하게 하는 일에는 기꺼이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몸의 공적(空寂)함을 들어 문병해야 합니다. 하지만 소승에서 말하는 극단적인 적멸주의(寂滅主義)에 빠져서는 곤란합니다. 지금까지 저지른 악행을 또렷이 상기시키는 것으로 문병해야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참회로써 그 죄업이 모두 소멸하리라는 투의 말로 위로를 해서는 곤란합니다. 자신이 몸소 병을 앓아봄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아픔까지도 측은히 여기고 전생에 겪었던 고통을 상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먼저 배려할 줄 알며 스스로 선근을 쌓고 티 없이 청정하며 애욕을 끊고 늘 정진함으로써 마침내 모든 병을 치료하는 의왕(醫王)이 되리라는 말로 문병해야 합니다.” (유마경 문수사리문질품)

 
 

6) 사족(蛇足)

유마경은 공성을 이해하고 나서 마음을 닦을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방편이 주는 유혹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깨달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곧 보살행을 통해 업장을 녹이는 자리이타의 보살행이다.

백봉선생님은 허공에 대한 지견을 바로 세우고 나서 경계와 분별을 놓아야 한다고 설법하셨다. 수행의 차례에 대한 관점에서 본다면 백봉선생님의 허공법문은 유마경의 종지와 정확이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백봉선생님의 금강경법문 중 일부를 인용한다.  

 

"나는 부처님 말씀과 여러 조사님들 말씀을 거꾸로 한 번 뒤집어 볼 작정이여. ‘망념이 본적하고, 망령된 여김이 본적하고, 진경이 본공이니라. 이걸 알면 견성, 성품을 보느니라.’ 이래 말씀했는데, 나는 정반대로 ‘우선 견성을 하면은 망념이 본적한 줄 알고 진경이 본공한 줄 안다’ 난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 백봉선생님 금강경법문 14 (74. 6. 3) 제3 대승정종분, (대도성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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